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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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완전히 모순이다. 고독이 어떻게 시끄러운가. 하지만 책을 읽으면 시끄러운 고독이 존재할 수 있는 걸 엿볼 수 있다. 화자는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화자 '나'의 정체성은 특별하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쨰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하지만 이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이 작업을 완수할 힘을 얻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나는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되었고, 이제는 내 뇌가 압축기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사고로 형성돼 있다는 걸 깨닫는다. 머리털이 모두 빠져버린 내 머리는 알라바바의 동굴이다. 모든 사고가 오로지 인간의 기억 속에만 각인되어 있던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10쪽)


이 부분이 바로 화자의 정체성이다.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는 중에 노동의 즐거움(?) 이라면 손짓하면 부르는 책이고, 또 책이 주는 종이의 촉감에서 얻는 쾌락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사실이다. 일이란 반복적이고 권태롭다. 이 권태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하는 일에서 어떤 장점을 발견해야하는데, 발견자로 역할을 하는 것은 개인의 몫으로 던져지는 경우가 흔하다. 화자는 버려진 책들에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나아가 책과 그 책의 저자들과 교감하게 된다. 하지만 책이란 매체는 고리타분하다. 변화하는 트랜드에 대치되면서 고독이라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는 하루 2톤의 종이를 압축하고 좋은 책을 골라내느라 8년 간 9센티미터나 키가 줄어든 걸 발견한다. 노화로 칼슘이 배출되면서 줄어든 키지만 역설적으로 원치않게 현자가 되었어도 눈에 보이는 건 오히려 초라함일 뿐이다.

화자가 사용했던 종이압축기는 구식이 돼어버리고 (아마도) 정권이 바뀐 정부에서 새로운 기구와 젊은이를 파견해서 종이를 압축하기 시작한다. 화자가 사용하는 방식보다 몇 배는 더 능률적인 기계와 그 기계를 대하는 젊은이들의 방식. 그는 하루 2톤의 폐지를 압축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셨다! 아-멘. 하지만 새로운 압축기를 사용하는 젊은이들은 우유와 콜라를 마시고 휴가를 계획한다. 폐지, 즉 버려진 책들에 대한 경건함은 무참히 짓밟히고 폐지를 압축하는 일은 컨베이어벨트를 돌리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얻게 되는 여가시간. 오후에 뭘 하면서 보낼지가 대화의 주제가 된다.

책은 무의미한가? 어쩌면.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은 모두 끝장이었다."(91쪽)

그리스에 대한 화자의 견해와 지극히 실용적(?) 혹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이들의 견해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들의 그리스 휴가 계획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헤르더와 헤겔의 책은 나를 고대 그리스에 던져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건만 내가 막상 휴가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 사르트르 양반과 까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 년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그러나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당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미소년들처럼 볕에 그을린 젊은 남녀들이 작업을 재개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도, 괴테도, 불멸의 고대 그리스도 모르는 그들은 헬라스에서 여름을 보내는 일에도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불안에 곤두선 책장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가치 따위는 전혀 아랑곳없이 냉정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93쪽)

이 책은 바로 이런 세대교체에 대한 만감이기도 하다. 이 만감이 내 감성세포를 흔든다.

덧. 번역이 상당히 거칠다. 비문도 상당하다. 이런 투덜거림이 의미가 없고 번역자의 노고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비문이 주는 혼동과 거슬림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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