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히치콕 영화를 그동안 완전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중이고, 완전 재미있는 걸 깨닫는 중. <현기증>은 두 말할 필요없는 영화기도 하지만 어쩌면 특정 장면과 그 장면 해석만이 유명하고 영화 전체를 곰곰이 다시 보면 '맥거핀'이란 말을 사용했듯이 스릴러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다. 왜 스릴러와 서스펜스의 거장이라고 알려져서는. 심리묘사 전문가이고, 특히 남자 캐릭터의 유약함과 신경증은 아주 흥미롭다.

2. 스릴과 서스펜스 카테고리로 히치콕의 영화를 묶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동반한 심리묘사 영화다. <현기증>에서 흥미로운 건 사랑의 속성이라는 묘사다. 사랑하는 대상의 실재는 A라면 우리는 A에 환상을 덧붙여 A'를 재창조한다. 즉 사랑은 A에서 발원하는 게 아니라 A'라는 자신이 창조한 허상에서 비롯된다. 이 허상이 없으면 사랑에 빠지기 힘들다. -.-;

<현기증>의 주인공 스카티와 매들린=주디의 관계를 보면 이 공식을 전형적으로 증명한다. 고소공포증을 가진 스카티는 대학 동기한테 차인 경험이 있다. 형사의 경력을 지닌 스카티는 퇴직 후 사립탐정으로 경력을 이어가는데 매들린이라는 여자의 경호라고 말하지만 미행을 하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이 상류층 계급의 아내인 매들린이라는 여자는 실은 주디라는 노동계급 여자에 의해 재창조된 허구다. 주디는 매들린이라는 여자를 연기하고 스카티는 허구인 매들린을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은 그를 고용한 고객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고, 그는 자신이 재창조한 대상에 눈이 멀게된다. 나중에 자신이 사랑한 매들린, 즉 A'가 실은 주디, 즉 A라는 걸 알게 되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는 걸 거부하고 사실을 지연시키기 위한 행동을 한다. 주디에 대한 끌림을 외면하고 주디를 다시 매들린으로 만들려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주디가 매들린 역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매들린처럼 만들기위해 매들린이 입었던 옷과 신었던 신발을 사주고, 헤어스타일을 강요한다.

주디, 즉 매들린은 현실적 인물로 스카티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런 스카티의 허구적 집착에 저항하면서도 그의 욕망을 실현하는, 사랑에 빠진 여인이 저항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스카티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어서 주디와 매들린이 동일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주디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이기심을 드러낸다.

3. 어릴 때(?)는 몰랐는데 <이창>에 이어서 <현기증>을 연속해서 보다보니 히치콕 영화에서 드러나는 남자 캐릭터의 신경증은 아주 흥미롭다. <이창>에서 제프는 다리에 깁스를 해서 움직일 수 없는 무력한 상태고, <현기증>에서 스카티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는) 여자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두 영화에서 남자 캐릭터의 공통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하지 못하는 무기력을 지녔다. 이 무기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고민하기 보다는 여자한테 기대는 서사가 이어진다. 제프의 연인은 제프의 지시를 넘어서 범죄 현장에 뛰어들고, 스카티의 연인(?)은 스카티의 고소공포증을 높은 종탑 계단 뒤에 남겨두고 행동하는 적극적 인물로 등장한다. 스카티는 사랑이를 쫓기 위해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게 되고.

스카티의 고소공포증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허상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환상을 부수고 사실을 마주하는 시간을 지연하는 수단으로 고소공포증은 기능한다.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순간 매들린의 허상을 인정하지만 주디라는 실체는 죽음으로 사라진다. 마치 그의 환상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것처럼. 환상을 깨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환상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이기적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4. <이창>은 대놓고 수동적 남자 캐릭터고, <현기증>은 남자 주인공이 특정한 순간에만 수동적이다.

5. 아쉽게도 <사이코>는 볼 수 없고, 마지막 주에 모르면 간첩인 <새>를 볼 수 있다. <새>는 과연 어떤 영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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