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동안 영화를 아주 안 본 건 아니지만 뭔가 남기기 힘들었다. 남겨서 뭐하나 하나는 허무주의가 몰려오기도 하고. 올 한 해는 정말 정신없어서 빨리 올해를 보내고 싶다. 엄청난 변화의 폭풍이 매일 몰아치는 기분이랄까. 체력은 걷잡을 수 없이 저질화되어 극장에 가는 일이 힘겹기도 하고. 어제도 오전에 볼 일을 보고 집에 와서 눕고 싶었지만 후회할 거 같아서 백만 년만에 아트시네마로 향했다. 정말 백만 년만이란 게 실감나는 게 서울극장이 리모델링을 해서 입구부터 헤매고 내가 정말 아트시네마에 온 게 맞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게 바뀌었다. 극장 로비를 세 번쯤 두리번거리며 왔다갔다 했고, 안내데스크에서 결국 안내를 받고 3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나만 다른 세계에 살다가 온 느낌.

2.
안토니오니의 <일식>은 이 비슷한 이야기이다. 약혼자와 헤어지기도 결심한다. 닫힌 공간에서 선풍기는 계속 돌아가고 남자는 헤어지고 싶다는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바뀐 거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여자의 심리만이 세상과 유리된다. 선풍기가 회전하면서 내는 사운드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들리는데 선풍기 바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실내공기 및 여자의 답답함이 오롯이 전해지고 남자의 헛소리에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는 더욱 거슬리게 된다.

3.
이렇게 힘겹게 약혼자와 이별을 고하고 나온 여자가 찾아간 곳은 엄마가 있는 증권거래소. 증권거래소의 아비규환은 덥고 고요한 바깥 풍경과 대조된다. 증권거래소는 욕망으로 물든 또 하나의 닫힌 공간인데 그곳에서는 예의나 질서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더 낮은 가격에 주식을 사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정보를 얻기 위해 염탐한다. 종이 조각에 영혼을 파는 무리들이 모인 곳.

4.
여자는 케냐출신의 친구를 만난다. 아프리카, 증권거래소, 약혼자와 그의 집, 모두 여자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길을 걷다가 만난 풍경은 어떨까. 고요한 열기 속에서 여자는 뭔지 정확히 실체를 모를 답답함에 갇혀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서 누구와도 교감할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을 잘 담아내고 있다. 요즘 내 기분같이. 뭔가 일이 많은데 내 일이 아닌 거 같고 내 아바타가 동분서주하는 느낌.

5.
역시 영화를 봐야지. 이탈리아 감독 영화에서 알랭 들롱의 미모는 이상하게 빛이 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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