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grace (Paperback)
존 쿳시 지음 / Penguin U.S / 200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덥기만 한 게 아니라 습해서 몇 걸음만 걸어도 모든 땀구멍에서 땀이 분출해서 동남아에 살고 있는 거 같다. 당면한 여러 가지 일들로 너무 정신없는 나날들이라 책과는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고 있고, 시간이 있어도 의욕없이 누워있는 시간이 너무 많고ㅜ 집중력은 가출한지 너무 오래되서 오래전부터 찜해둔 존 쿳시의 <추락>을 꽤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 읽은 지 꽤 됐는데도 밑줄 그은 부분을 정리 안해서 찝찝하게 책을 째려보다가 오늘은 <덩케르크> 보러 가기 전에 마음 먹고 정리를 한번 해보자.

존 쿳시의 대표작으로 존 쿳시의 소설은 처음인데 꽤 흥미롭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절대로 말할 수 없으며 자신이 같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타인의 고통을 돌아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사실 내러티브가 너무 극단적이라 꼭 이렇게까지 밀고 나가야하는 반감이 들기도 하지만 자극적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양가성을 실험하기 위한 장치라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흥미롭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 대학교수, 즉 1세계 출신으로 성적 충동과 같은 본능적 욕망에 대해 꽤 당당한 입장을 이야기 처음에 밝힌다.

"One can punish a dog, it seems to me, for an offence like chewing a slipper. A dog will accept the justice of that: a beating for a chewing. But desire is another sotry. No animal will accept the justice of being punished for following its instincts."(88)

그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여학생의 수동적 태도를 이용해서 욕망을 채운 후, 어떤 죄책감도 없다. 다만 대학이라는 제도 내에서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처벌을 논할 때 그는 교수직을 내놓는 것으로 자신을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들어간다. 원주민의 땅에서 혼자 농장을 하면서 살아가는 딸과 그 이웃들의 삶은 그가 여태까지 알았던 질서에서 벗어난다. 유기견 안락사를 시키는 벨 쇼브를 보면서 그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한다. 유기된 개를 사랑으로 극진히 보살피다 입양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 개를 죽음으로 던지는 일이 개에 대한 사랑인가 아니면 잔혹함인가?
"He assumes that people from whom cruelty is demanded in the line of duty, perople who work in slaughterhouses, for instance, grow carapaces over their souls. Habit hardens: it must be so in most cases, but it does not seem to be so in his. He does not seem to have the gift of hardeness."(140)

벨 쇼브는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하고 그 누군가가 자신이라고. 사랑과 잔혹함은 다른 얼굴이지만 한 몸이라는 것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 많은 유기견을 어떻게 할 것인가, 란 문제가 남는다. 이런 질서에 따라 살고 있는 딸의 주변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대학을 벗어나자 그는 무기력할 뿐이다.
"But there are other people to do things-the animal welfare thing, the social rehabilitation thing, even the Byron thing. He saves the honour of corpses because there is no one else stupid enough to do it. That is what he is becoming: stupid, daft, wrongheaded."(143)

이렇게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서 자신이 알던 질서와 다른 질서에 들어와 가치관 혼동을 겪으면서 그는 바이런을 버리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한다. 그러는 중에 딸은 원주민 청년들한테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한다. 그는 아버지로서 딸의 안전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득하지만 딸은 원주민의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선택을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 데이비드한테 이렇게 말한다.

"David, I can't run my life according to whether or not you like what I do. Not any more. You behave as if everything I do is par of the story of your life. You are the main character, I am a minor character who doesn't make an appearance until halfway through. Well, contray to what you think, people are not divided into major and minor."(193)

결국 아버지는 딸의 삶을 망치는 게 자신의 삶을 망치는 거라는 무의식에서 기인한다. 딸은 백인사회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에서 독립을 하기로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기준과 어긋날지라도. 딸이 겪은 극단적 고난을 통해 쿳시는 질서가 다른 두 세계는 옳고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삶의 이치는 우리가 믿는 이성, 실은 학습되어 계몽된 이성 하나만으로 재단할 수 없다. 딸이 선택한 질서는 서구의 이성이 가르치지 않은 아프리카의 이성이고, 더 나아가 딸이 살아가면서 체득한 이성으로 인정해야한다.

한 지식인이 물리적 변화를 겪으면서 어떤 정신적 방랑을 하게 되는지 서늘한 문체로 쓰여있다. 단문에 거의 현재시제를 사용하는데 현재시제는 묘한 긴장감을 주고 사건에서 거리두기로 작용한다. 과거시제가 사건을 전달하고 확정하는 면이 있다는 걸 쿳시 글을 읽고 깨달음.

*바이런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오는데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그의 여성편력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시의 정서에 본능에 충실한 무언가가 있나, 하는 궁금증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