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식 여성 원탑 히어로 영화다. 기존 질서, 즉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힘의 세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복수하는 한 여자가 있다. 힘에는 힘이라는 논리로 맞서는 미셸. 미셸을 둘러싼 환경은 남성 중심주의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마을에서 벌인 살인과 그 순간에 희생자지만 미디어의 힘에 의해 진실은 버려지고, 단 하나의 왜곡된 이미지로 어린 미셸을 판단하는 세상. 아버지에 대한 증오, 세상에 대한 냉담한 시선으로 삶을 꾸려왔을 그녀. 이제는 게임회사 운영자다. 가상세계에서 극단적 폭력은 허용되고 남성들로 이루어진 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미셸은 결정권자 되어있다. 새로운 게임 개발에 대한 혹독한 비평으로 개발자들은 그녀한테 소극적 복수, 하지만 남자들이 흔히 하는 성희롱(혹은 추행)을 게임 캐릭터로 보복한다. 그러나 이성을 잃지않는 미셸.
그녀는 남자들이 세운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배우자가 있는 남자들과 바람 피우기, 이웃집 남자를 망원경으로 훔쳐보면서 자위하기 등등. 그녀는 기존 질서라고 받아들인 것에 이런 식으로 저항한다. 미셸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타인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여인의 연대가 전제조건으로 깔려있다. 가령 미셸의 아들이 갓난 아기일 때 아들한테 젖을 준 안나는 동료이자 절친이다. 안나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고 치근덕거리는 안나의 남편을 떼어버리기 위해 안나한테 사실대로 말해버린다. 안나는 남편을 버리고 미셸과의 우정을 택한다. 보통 여자들이 하는 선택과는 다른다. 안나와 미셸의 연대는 어찌보면 동양적 정서가 녹아있기도 하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한 남자를 매개로 두 사람이 친구나 자매처럼 지내는 이야기가 한국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꽤 다뤄졌다.
이웃집 남자에 대해 미셸은 성적 충동을 갖지만 이웃집 남자가 접근하는 폭력적 방식에 대해서 미셸은 놀라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그녀의 심장은 차갑고 머리는 이성적이다. 두려운 게 없는 것처럼 보이고.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고 그녀 덕분(?)에 교도소에서 자살을 한 아버지 시신 앞에서 복수극을 끝내는 한마디를 한다.
불편하기 이를데 없는 서사다. 복수에는 복수로 맞서는 냉랭하고 두려움 없는 여자의 이야기. 어제 영화를 보고 이런 느낌이었다.
2.
오늘 오전에 친구한테 전화를 받았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단순한 실수로 고객과 문제가 있었고 슈퍼 갑인 고객 중심으로 일을 처리하겠다고 결정한 회사 전화를 받았다. 회사는 갑이고 직원인 친구는 슈퍼 을이다. 고객>회사>직원이라는 구조적 힘을 가진 조직이다. 친구는 억울해서 상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슈퍼갑과 갑은 을의 상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 비상식적 슈퍼갑과 갑은 을의 상식을 이기고 나도 조직에 맞설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라고 했다. 억울하더라도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가? 을의 복종이 계속되는한 갑질은 영원할 것이다.
3.
그래서 어제는 불편했던 <엘르>의 미셸의 살아가는 방식이 오늘은 그럴듯해보인다. 제도란 개인의 저항으로 바꾸기에 너무 힘드니까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세계관을, 영화 속에서라도 이뤄봐야하는 거 아닌가. 만약 미셸이 경찰에 신고하고 제도권의 도움으로 일을 처리하려면 그녀 역시 제도권 내에 속하는 힘이 있어야하는 게 아닌가. 결국 시스템의 힘을 깰 수 있는 건 개인의 방법이라고 여자 원탑 히어로 영화들이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러면 공동 자멸인데....
4.
이자벨 위페르는 따뜻한 연기보다는 차가운 역할이 참 잘 어울린다. 실제는 어떤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