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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평점 :
며칠 전에 아빠가 뭘 물었다. 대답을 했는데 못 알아들으셨다. 귀가 잘 안들려서 데시벨을 올려야하는데 다시 말하려니 짜증이 나서 대답 대신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고 쏘아붙였다. 아빠는 "나도 젊을 때 있었어, 못 알아들었으면 열 번이라도 다시 말해줘야지 왜 짜증을 내. 부모는 자식이 뭘 몰라 물으면 열 번이라도 다시 설명해주는데 자식은 한 번만 더 물어도 짜증을 내"라고 하시면서.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알지...하는 마무리를 하셨다. 순간 아빠한테 엄청 미안했다. 다시 말하는 게 뭐가 힘든 일이라고 짜증을 냈는지 .어릴 때 뿐 아니라 불과 두 달 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 과자, 빵 등 주전부리를 사들고 매일 병원에 오셔서 내 머릿맡에 잠깐씩 앉아있다 가셨는데...
이 소설집을 읽으니까 아빠 생각이 난다. 부제가 가족소설이다. 말 그대로 이기호 작가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썼다. <갈팡질팡하다 이럴 줄 알았다>의 서문을 보면 불안을 씨앗 삼아 글을 쓰는 청년이었는데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이다. 작가답게 세심하고 때론 소심하다. 문득 이런 사람을 배우자로 두는 아내도 작가 못지않게 세심할 거 같다. 실제로 작가는 아내의 육아 지옥에 물리적으로 많은 도움은 못 줘도 정신적으로는 그 고통을 분담하고 땡땡이 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반성이 깔려있어서 작가의 아내는 그래도 다른 아내들보다 행복할 거 같다는 생각이.
이기호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주변인들이고 희화한다. 희화화가 자칫 타자화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데 이기호 작가의 인물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처구니없는 유머 속에 따뜻한 인간애를 전해준다. 사실 어찌보면 상황이나 처지를 180도 바꾸는 일은 현실에서는 많이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입장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현실은 희망적이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행복은 마음에 있다는 말이 나온거고.
"세 아이 모두 학원은 다니고 있지 않지만, 합기도 체육관과 동네 카페 2층에서 한 선생님이 자원봉사 형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자소학' 교실만큼은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다. 아이 친구들 역시 모두 함께하는데, 그러니까 이 동네 아이들은 낮에는 무술을 연마하고 저녁에는 '소학'을 읽는, 겉모습만큼은 무슨 나라를 구할 아이들처럼 보이기도 한다(나라를 구하기 이전에 제발 발이라도 스스로 잘 닦고 잤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246쪽
책장을 덮기 전 에필로그에 쓰여진 말인데 다시 한 번 빵 터졌다. 시선의 힘이다. 소심하지만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가진 작가의 눈으로 보는 일상혈투를 읽은 후 심장이 따뜻해진다.
오늘 아빠는 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셨다. 지금쯤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계시겠지. 이 책을 읽으니 아빠가 어릴 때 품에 안고 잠을 재워주던 생각이 난다. 아이를 키우는 이들은 거꾸로 아이를 재우던 때가 생각날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