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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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텍스트는 읽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여지를 담고 있는 거다. <거미 여인의 키스>가 그렇다. 작가는 영화를 공부하고 영화에 재능이 없는 걸 깨닫고 소설로 방향을 틀었단다. 정치범 발렌틴과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몰리나가 감옥의 같은 방에서 고독을 이기기 위해 몰리나가 영화 이야기를 5편이나 한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영화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고 있다. 구성상 이 소설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밖에 없다.

 

먼저 나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가 크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다. 좌익 게릴라와 게이. 닮은 꼴이라고는 주변인이라는 것 밖에 없던 두 사람의 관계는 같은 공간을 상사용하는 타의적 동료였다. 발렌틴은 몰리나한테 "아름다운 일만 생각하는 네 태도는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단 말이야.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마약처럼 해로운 거야.(...)그래서 난 책을 읽고 하루 종일 공부하는 거야."(109)라고 말한다.

 

세상을 직시하고 바꾸려는 발렌틴,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에 비관하기 보다는 현실을 잊고 싶어하는 몰리나. 몰리나가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건 당연하다. 영화는 훌륭한 현실 도피 수단일 수 있고 어쩌면 몰리나가 발렌틴한테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는 영화가 아니라 몰리나의 상상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서서히 발렌틴은 잠자기 전에 책보다는 몰리나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고 그러다 관계가 극적으로 변하는 시점이 있다. 발렌틴이 심한 설사를 하면서 아프게 되고 몰리나는 발렌틴을 정성껏 돌본다. 몰리나는 프락치였고 자신의 이익(사면)을 위해 발렌틴을 돌본다. 발렌틴의 육체적 고통은 그가 믿었던 남성성에 대한 개념을 혼란에 빠뜨리고 몰리나한테 의존하게 만든다. 두 사람은 아주 다른 지점에서 시작했지만 병이란 매개를 통해 한 공간을 사용하는 동료로서 연대감이 싹튼다.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한 곳으로 수렴된다.

 

-널 그리워할 것 같아, 몰리나...

-영화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영화 이야기까지도...

-통조림에 든 과일을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날 거야.

-치킨집 윈도에서 바비큐 치킨을 볼 때마다 널 기억할 거야. (342-343)

 

이렇게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면서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에 분리가 가능한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움이란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필요충분조건이다. 몰리나가 사면되어 감옥을 나가게 되자 발렌틴이 몰리나 한테 하는 말이다.

 

2

이 소설은 사랑의 담론에 관해 몰리나가 영화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럼 이 소설은 연애소설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커플의 상황과 독특한 사랑 방식을 통해 정치적 우의성을 담고 있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던 한 개인이 정치적 개인을 만난다. 몰리나는 발렌틴에 대한 우정 혹은 사랑으로 발렌틴의 게릴라 조직에 연락을 하다가 죽는다. 처음에 자신의 사면을 위해 발렌틴을 이용하려 했던 몰리나는 발렌틴을 사랑하게 되면서 발렌틴을 돕는다. 아무리 강력한 독재정권도 개인 간의 사랑을 억압할 수는 없다. 행동은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사람 사이에 튀는 불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감시를 뚫고 이겨내게 한다. 성소수자인 몰리나가 결코 육체적 사랑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

 

3

-편지를 써.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네가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어.

-넌 세상이 바뀌리라고 믿니?

-그래, 네가 비웃어도 괜찮아...그렇게 말하면 비웃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세상을 바꾸는 것이야.

-하지만 이 세상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어. 너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어. (63)

 

몰리나의 말대로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 세상을 지탱하고 바꾸는 원동력에는 개인적 동기가 강한 추진력일 수 있다. 그 동기가 동지애든 사랑이든.

 

덧. 많은 각주, 주로 프로이트와 심리학에 관한 각주가 달려있는데 왜 달려있는지. 독서에 방해된다. 빼줬으면 좋겠다.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해석을 돌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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