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교에 따르면 사랑의 본질은 질투다. 누가 사랑을 온유하며 참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나. 사랑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속성이 있다. 특히 이성간에 작동하는 사랑에는 포용이 들어갈 수 없다. 포용은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혹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사랑의 유형이다. 이성간에 사랑은 신과 신도 사이의 사랑이 아니기에, 무수히 들어온 가르침대로 온유를 가장하는 체 할 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이성간의 사랑에서 키워드는 격정이다.
<45년 후>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영화다. 45주면 결혼 기념일 파티 일주일 전에 노부부의 일상을 흔드는 소식이 날아든다. 남편의 첫사랑이 죽었다는 소식. 아내와 평지도 산책 안 하는 남편이 첫사랑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에 알프스 산에 가겠다는 말에 아내는 발끈한다. 남편의 과거를 겉으로는 쿨하게 인정하는 아내. 그리하여 남편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척해보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다. 남편의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45년 전, 자신을 만나기 전 남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한테 마음이 온통 가 있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한다. 객관적으로 이 무슨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인가 싶지만 사람은, 특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한테 쿨할 수 없다. 쿨해진다는 거 자체가 그 대상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므로.
남편은 아내의 이런 마음을 알 턱이 없다. 영화는 전적으로 아내의 미묘한 심리적 출렁임을 다루고 있다. 무익해보이는 이런 질투 아닌 질투는 입 밖으로 말하면 찌질한 내용이기에 말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아내는 고상하고 45년 간 남편의 사랑을 받아왔다. 45년 간 받은 사랑의 크기는 아내한테 중요하지 않다. 아내는 45년 간의 사랑이란 틈 속에 섞여있을 수 있는 이물감이다. 어쩌면 이 이물감은 남편이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이 무덤까지 해로하면서 갔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기도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 시각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남자한테 과거는 삶을 이루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여자한테 (특히 남자의) 과거는 균질성을 흔드는 커다란 사건이다. 사랑을 바라보는 남녀의 차이는 노인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말하는 영화기도. 그런 격정적 감정의 흐름 속에서도 아내는 그동안 유지되어온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남편을 의심하면서도 파티날 연주할 음악 선곡 전화를 받았을 때, 곡 리스트를 말한다.
밋밋한 영화인데 클라이막스는 파티 장면에서 남편이 축사를 하는 장면이다. 45년 전 이 날, 결혼하자고 아내와 장모를 설득한 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감동적 축사인데 아내는 다른 이유, 즉 분해서 눈시울을 붉힌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의식이 이어지고 춤곡이 끝났을 때, 남편의 손을 뿌리치면서 냉랭한 얼굴의 아내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남편은 아내의 감정 동요를 알 길이 없고 아내와 관객만이 감정의 깊은 파고를 감지한다. 사랑에서 상대를 더 사랑하는 이가 약자다. 아내는 약자라고 부를 수 있고, 남편은 무의식적 무심으로 강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흥미로운 건 남편은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파생되고 남자와 여자가 다른 별에서 산다는 말이 나온다.
결혼 45년 후에도 이런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부부라니,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