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케이트 블란쳇이 나온다. 무조건 봐야하는 영화다. 언제나 매력적인 케이트 블란쳇이만 이 영화에서도 아주 매력적이다. 가만히 보면, 케이트 블란쳇은 좋게 말하면 눈이 촉촉하고 나쁘게 말하면 눈이 끈적거린다. 캐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경험을 한 테레즈를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몹시 유혹적이면서도 과하지 않다. 잘못하면 느끼할 수 있는 눈을 가졌는데도 말이다. 미소 역시 마찬가지다. 활짝 웃는 게 아니라 입술을 살짝 올리는데 비웃는 거 같기도 하고.
2
사랑의 감정, 아니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을 살피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재미나게 읽고 있는 요즘이다. <스완의 사랑>이 질투에 방점을 찍는다면 화자가 질베르트한테 갖는 감정은 짝사랑이고 역시 상상이다. 화자가 질베르트한테 보이는 사랑의 실체(?) 묘사는 더 이성적으로 보인다. 현실 속의 질베르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화자가 재구성한 질베르트를 사랑하고 그 사랑의 실체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다. 사랑의 담론을 다루지만 우리가 사랑, 연애란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일반적 감정을 다 배반한다. 나는 그래서 재밌다.-.-
3.
<캐롤>은 논리적이지 않다. 두 여인이 만나는 과정, 친해지고 함께 길을 나서는 과정에서 설명할 수 있는 명쾌한 사건이 실제로는 없다. 하지만 사랑의 실체는 이런게 아닌가! 그냥 끌리는 거. 사실 나는 그냥 끌리는 거, 따위 믿지 않는 편이라, 영화를 보면서 좀 답답하기도 했지만 사랑의 본질은 말로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프루스트가 저렇게나 분석적일 수 있단 말은 대상을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을 사랑해서다.
캐롤은 테레즈가 일하는 가게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갔다가 장갑을 두고 오고 테레즈가 보내준다. 캐롤은 감사 표시로 저녁식사에 초대를 한다. 이런 구태의연한 서사가 어딨나. 하지만 그 사이에 많은 으뭉스런 시선이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갔다. 캐롤이 뭘 선물로 사는 게 좋냐고 물을 때, 테레즈가 집에 갔으 때. 테레즈의 시선은 의뭉스럽다기 보다는 경계와 혼란스러운 시선 사이에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케미가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캐롤의 의뭉스런 시선을 테레즈가 중요한 기호로 읽어내고 해석하려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걸 우리는 호감이라고 부르는데 사람이 사람한테 호감을 갖는데 무슨 개연성이 필요할까.
그래서 영화를 보는 중에는 참 맥없는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걸어오면서 이렇게 격정적인 러브스토리가 어딨나, 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사랑은 논리도 없고 그저 빠져드는 거지. 따뜻한 볕이 나오면 저절로 끌려서 볕이 드는 곳에 서 있듯이.
4
감독이 퀴어영화로 잘 알려져있는데 나는 영화 보고 위키피디아 검색 후 알았다.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동안 동성애, 그것도 레즈비언을 묘사하는데 남성 시선 중심의 카메라 앵글을 사용해서 사실 몹시 거슬렸다. 특히 캐롤을 잡을 때, 카메라가 가장 뒤에 비스듬하게 있고 중간에 누군가의 등짝 조금, 아니면 욕실문이나 방문이 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치는 캐롤을 잡아내는데 관능적이면서 관음적이다. 혹은 테레즈와 캐롤이 차를 타고 며칠을 달리는 과정 중, 밀폐된 공간에서 캐롤의 얼굴을 담아내는 방식이 감독이 게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정도다. 대조적으로 테레즈를 잡아내는 방식은 좀 거리를 두는 편이다. 물론 테레즈를 연기한 루니 마라의 수줍고 놀란듯한 표정, 그리고 주저하는 태도 덕분에 캐롤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화려하게 보일 수 있다.
5
나는 이 영화를 계급의 문제로 보고 싶지 않다. 가시적으로 테레즈는 무산계급이고 캐롤은 유산계급이다. 캐롤의 압도적 태도에 테레즈가 끌려가는 것 같지만 성sex만 치환되서 그렇지 이성애에서도 우리는 무수하게 백마탄 왕자, 신데렐라 공식을 접한다. 이성애에서는 백마탄 왕자를 강망하는 로망에 기반해서 열광하면서 동성애에서는 계급의 탓을 하는 건 일관된 태도가 아니다.
한 사람의 태도 혹은 감정을 다른 한 사람이 지배할 수 있는 요소가 뭘까. 물질도 물론 중요하고 경험도 중요하다. 사랑을 해 본적이 없는 테레즈는 자신한테 밀려온 감정의 쏠림이 뭔지 모른다. 캐롤한테 끌렸지만 그 실체를 모른 채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아나선 테레즈. 그녀는 타임지의 사진기자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캐롤의 선택이 아니라 테레즈 자신의 선택으로 캐롤한테 찾아가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이 엔딩이다.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것. 타임지 기자는 여전히 노동자지만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을, 테레즈는 그 사이에 했을 것이다. 부럽네, 이 커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