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다르 영화. 5월에는 아트나인에서 고다르의 초기작을 상영한다. 고다르의 인기는 세대를 초월한다. 벌써 거의 다 매진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당일 날, 취소표가 여러 장 나온다. 한 발 늦은 나는 취소표를 노린다.ㅋ

 

할 말이 너무 많기도 하고 그래서 할 말이 너무 없기도 하다. 점프컷의 교과서 같은 작품. 고다르의 영화는 정치적 색채가 강하지만 초기작들은 영화와 예술 그 자체에 대해 골몰한다. 내러티브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별 의미없다. 이 영화는 보고 또 봐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줄거리 중심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형식을 위한 영화이기에. 영화 언어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누구나한테 충격을 주는 늘 새로운 영화다. 거의 50년 전 영화인데도 여전히 실험적으로 보인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욕조에 앉아 <예술의 본질L'essence de l'art>에 관해 딸 아이한테 읽어 준다. 벨라스케스를 묘사하는 대목이었고 더 이상 사물을 그리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마리안느가 폴이라고 부르는 페르디낭이 영화 전체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부르주아 아내집을 뛰쳐나와 도주를 하면서 소설을 쓰면서 이런 말을 한다. "삶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쓰고 쓰고 싶다"고. 모든 예술작품의 본질이 삶의 언저리를 맴도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다르한테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데서 벗어나 삶을 사는 것일 수 있다.

 

그럼 삶은 뭔가. 차 안에서 두 사람이 베트남전에서 115명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전쟁의 익명성에 대해 마리안느가 말한다. 우리한테 죽은 이는 숫자로만 남아있다고. 그들도 죽기 전에 각자의 삶이 있었을텐데 우리는 그저 죽은 115명으로 기억할 뿐이라고. 예술의 본질과 삶의 본질을 고다르는 동일시한다. 삶은 곧 행동이고 감정이고 예술은 그걸 옮기는 것이다. 고다르한테 영화란 매체는 행동을 위한 일종의 수단이기도 했다.

 

이 영화에 대해 적지 않은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지금과 달리 꿈을 꾸었던 시절이라고 해 두자. 모더니즘이란 시대배경, 미국식 탐정영화, 미국문화에 대한 추종과 저항 따위 등등이 머리속에 플래쉬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산만한 나열은 무의미하다. 내 감정도 행동도 아니기에. 역으로 말하면 내가 행동하고 느끼는 것만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덧. 10년 전 쯤에 난 무슨 생각을 했나 들여다 봤다. 2005년 7월, 기록을 보니 진지하게 영화를 봤지만 예술로, 삶으로 보지 않고 있더라....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 이어 두 번째로 본 고다르의 칼라영화.

영화촬영 전날에 이 영화를 위해 고다르가 갖고 있었던 것은 Lionel White의 <Obsession>뿐이었다고. 내러티브의 실험이고, 계획되지 않은 즉흥적 영화임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프랑스식 탐정영화이면서도 그 성격이 모호하다. 마리안느와 페르디낭이 눈이 맞아 도피를 하면서 저지르는 범죄 속에 인과관계가 없고, 추격의 양상은 형식적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따라다니는 textuality에 대한 진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위 ‘고급문화’라고 불렸던 소설, 시는 물론이고 그림 등에 대한 콜라주들로 현란하다. 고급문화에 대한 동경은 광고, 잡지, 소비사회를 상징하는 파티에서 나누는 대화 등에서 나타나는 ‘하위문화’에 대한 지루함으로 묘사되고, 삐에로, 즉 페르디낭이 마리안느와 모험을 하는 구실이 된다. “삶이 책과 달라서 슬프다”는 마리안느의 말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의 많은 부분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고, 고다르의 정치관이 쏟아져나온다. 


이 영화의 즐거움 중 하나는 미장센들의 화려한 색조다. 빨강과 파랑의 대비! 보고 또 봐도 감동적이다. 대사의 흐름이 널을 뛰듯 솟아올랐다 내렸다하는 데 비해 미장센은 계산된 듯하고, 카메라 움직임도 그림의 효과를 주듯 긴 호흡의 쇼트들이 빠른 쇼트들과 혼재한다. 레오 까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나 <나쁜 피>가 보이스 오버를 통한 언어유희나 미장센에서 ‘고다르의 후계자’란 말이 왜 나왔는지 분명히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영화를 문학의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절대 영향력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벨바그에서 프랑스 영화가 벗어나질 못하게끔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80,90년대 ‘시네마 뒤 룩’을 비평가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원인의 주범은 어쩌면 누벨바그 감독들이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상, 즉 ‘편견’이라 불리는 것의 위력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보이스 오버와 보이스 오프는 구별되어야할 것도 같다. (브래니건의 6개의 층위 이론에 따르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