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영화로 몹시 어두운데 나는 몇 년 째 새해 첫 영화를 우울한 영화로 시작하는 거 같다. 의도한 게 아닌데 해가 바뀌는 것에 가뜩이나 설렘이나 기대가 없는데 더욱 더 기대 없이 만드는데 일조하는 영화기도 하다.
원제가 과거인데 마리와 아미드가 이혼하려고 만나면서 마리의 과거사가 퍼즐 조각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고 뱃속에 아이가 있는 마리. 세 아이의 아빠가 모두 다르고 뱃속의 아이 아빠랑 결혼하려고 하고 전남편과 이혼하려는 여자. 십대인 큰 딸이 엄마의 사생활 편력을 혐오하면서 마리의 삶은 두 국면을 맞이한다. 여자로서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 요즘 육아로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면 아이를 낳는다고 엄마로서의 삶을 사는 게 당연한 건 아닌듯 싶기도 한데 엄마로 사는 건 여자로 사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리는 딸의 보호자로서 책임과 사랑 혹은 남편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을 부도덕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거칠게 말하면 과거를 잘 살아야 현재와 미래가 편안하다고 쉽게 내뱉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를 잘 산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하지 말았어야할 일 투성이고 좀 더 현명했어야할 일 투성이다. 과거가 현재였을 때는 그 선택이 최선이라고 선택했을 가능성이 많다. 현재가 과거가 된 후에야 오류와 문제점을 볼 수 있는 게 인간의 장점이자 약점이 아닐까.
전반부는 마리와 아미드의 관계를 통해 마리의 입장에서 퍼즐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후반부는 마리와 결혼을 앞 둔 사미르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 된다. 사미르의 가정 생활은 아마도 원만하지 않았다고 짐작된다. 카메라는 사미르와 마리가 만난 달달한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사미르가 마리를 만난 후 겪게 되는 불행을 탐구한다. 사미르의 아내가 자살시도를 하고 식물인간이 되는 이유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미르의 진심도 드러난다. 사미르는 아내를 잃은 슬픔보다는 아들의 엄마를 잃었다는 슬픔이 더 크다. 어린 아들은 새엄마가 될 마리한테 때때로 적개심을 나타내고 삐딱하게 행동하는데 아들의 비극을 근원을 본인이 제공했다는 죄책감이 크다.
복닥이며 사는 게 뭔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영화 장면들이 주로 좁은 실내에서 일어난다. 지독하게 사실적이고 한 순간의 낭만도 없이 묘사되는 사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인물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스크린 밖으로 온전히 빠져나와 달려드는 것 같다. 영화 속 인물들의 무게를 지켜보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영화를 왜 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