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주란 공간은 실제로는 추상적인데 이미지와 학습 덕분에 우주가 친근(?)한 것도 사실이다. 음악도 나오고 수다도 떨면서 밑도 끝도 없는 광활한 공간에서 유영하는 모습은 잠깐, 몽환적이었다. 바다 속에서 스쿠버 다이빙할 때 느낌같기도 하고. 대지를 중심으로 아래와 위는 닮은 모습이 아닌가. 무거운 장비 속에 갇혀 있지만 중력 부재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물을 보면서 평화롭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산드라 블록의 생존기를 보면서 곧 가슴을 졸였다. 먼 과거 딥다이빙을 하다 조류를 만나 제주도 바다 한가데서 표류했던 개인적 경험과 3D안경을 쓰고 경험하는 시각적 생생함이 더해져 우주에 산드라 블록과 같이 있는 기분을 느꼈다.
2. 곧 중력 부재로 일어나는 참사는 중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물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고 두 발로 서는 걸 의문시해 본 적도 없다. 중력이 있으니까. 중력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재난이라기 보다는 호기심이 생기는 다른 상황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 이 영화를 보니까 중력의 위력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작은 불씨도 공중에 떠다녀서 큰 화재가 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우주 쓰레기에 대해 읽었던 게 떠오른다. 이 영화 속 재난은 실제로 우주 쓰레기 탓이다. 궤도를 벗어난 위성은 무수하고 인간은 우주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수한 실패가 동반되는 시도를 한다. 우주정거장의 잔해, 소유즈의 잔해, 잘 못 쏘아 올린 위성들은 무중력 상태에서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떠돈다. 그러다 어떤 부딪칠 물체가 있다면 부딪쳐서 작은 파편이 되거나 또 다른 커다란 파편을 재생산한다. 우주는 무중력을 제공하고 인간의 탐구에 대한 욕망은 인간한테 다시 돌아온다.
우주인을 죽일 수 있는 건 결국 인간이다. 우주 쓰레기도 그렇고 우주선이든, 소유즈든 인간이 생리적으로 살아있게 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은 유한하다. 연료는 떨어질 수 있고 복잡한 작동 기계들은 결정적 순간에 고장나거나 오작동 될 수 있다. 기계는 인간의 판단력이 없으면 고철 쓰레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건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3. 생각보다 줄거리가 단촐해서 깜짝 놀랐다. 초반에 조지 클루니가 우주 미아가 돼서 후반에는 다시 만나겠거니 했는데 끝까지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혼자 우주를 빠져 나오는 이야기다. 우주에 단 한 명의 생존자를 남기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스톤 박사의 지구에서의 삶을 미루어짐작해 보면 공간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혼자라고 느끼는 인물에 대한 시선이 있다. 저녁8시면 뭘 했던 시간이냐고 조지 클루니가 묻자 스톤 박사는 운전하면서 멘트가 없는 라디오를 듣는다고 했다. 스톤 박사는 지구에도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쓸쓸하지만 다른 이한테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는 삶. 최후의 순간에 지구에서 삶에 희망없었던 걸 기억해내고 우주에서 죽음을 택하려는 찰라가 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지구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건 잘못 잡힌 주파수로 들은 아기 소리다.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에 그 소리의 진원지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아무도 없는 우주에서 지구로 귀환을 추진하는 힘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희망이다. 지구로 귀환해도 스톤 박사의 개인적 삶은 우주에서와 같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들으려 귀를 기울이고 손을 뻗으면 어디에나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중력의 법칙만큼 명확히. 마지막에 바다에 착륙해서 구조대를 곧 보내겠다는 신호를 받지만 영화는 끝내 구조대를 보내지 않는다. 헤엄쳐서 해변으로 나와 자신의 힘으로 두 발로 서려고 노력하는 장면으로 끝이난다. 사람에 대한 믿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 즉 진화론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지구에 도착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이 생존을 위해 역할을 한 이후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온다는 구조대가 안 오는 걸 탓하면 안 된다. 구조대가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살아남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