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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연말에 가끔씩 국방부 금서 목록이 떠돌면 그 책들은 인기를 얻고 우리는 국방부를 조롱한다. 예전에 우연히 케이블 채널에서 <인간극장>에서 여자 파일럿을 다룬 편을 보게 되었다. 금남의 영역에 여성의 자긍심에 초점을 맞추는 게 프로그램의 주요 목표였지만 나는 국방부가 왜 책을 못 읽게 하는 지 깨달았다. 여성 파일럿의 일과를 카메라가 따라다닌다. 직업 군인이 하루 종일 해야하는 일은 가상을 적을 만들고 공격과 방어를 반복하는 일이다. 하루는 숲 속에서 게릴라 전처럼 적이 나올 곳을 예상하며 몸을 움직이고 숨고 했다. 날씨도 화창하고 적도 없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저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군인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임무를, 나처럼 우스꽝스럽게 생각한다면 마땅히 해야할 일과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제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 머리 속에 복잡해지면 단순한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국방부는 머리가 복잡해질 수 있는 책을 원천 봉쇄해버린다. 중세 교회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인이 책을 금기시한 일과 맞닿아 있다. 책은 실제 일상에는 무익할 수 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길을 안내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특히 나처럼 요약해야 하는 성격을 지닌 이한테는 조금 짜증도 난다. 결론도 없고 온갖 사례와 철학을 끌어다가 나열해 놓는다. 기나긴 나열을 읽다보면 지젝이 말하는 폭력의 개념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큰 성과는, 지젝이 던진 폭력의 개념에 대한 고찰보다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성찰reflection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발견하는 일다. 일정량의 노동에 길들여져서 모든 사고가 생활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머물러있다. 이따금씩 전에 읽었던 책들을 펼쳐보지만 곧 덮고 새로 주문한 책들로 휘-익 들춰보고 처박아둔다. 뭘 새로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거의 안 하고 안락한 하루하루에 점점 빠져들 채 시간은 광속으로 흐른다.하고 있는 리서치라고는 어디로 놀러갈까 매일 소셜 커머스 들여다보고 가격 비교나 하고 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내일은 좀 오늘과 다르게 의미 있게 보내자, 하면서도 일과가 끝나면 비슷한 짓거리를 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내가 내 자신한테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면서 그 폭력을 주변으로 무심코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폭력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며 사고를 계속 해야한다는 자극을 주는 책이다.
"만약 우리가 폭력이란 말을 기본적 사회관계를 발본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몰지각하고 정신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수백 만 명을 학살한 역사상의 '괴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 괴물들이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