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이 있는 영화는 늘 설왕설래하는데, 나는 원작과 영화는 별개로 생각하기 때문에 재밌게 봤다. 영화가 소설이든, 만화든 각색을 하면 다른 예술 장르로 들어가는 걸 인정해야 한다. 원작은 원작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 이 영화는 허술한 점도 많지만 B급 장르 영화들만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이 분명히 있다. 영화기에 가능한 약간의 가벼움과 신선함이 종종 실소를 만들어 낸다. 심지어 나는 코엔 형제의 그림자도 봤다!

 

1. 내가 흥미롭게 본 점은 범인과 범인을 둘러 싼 동네 주민들의 관계다. 미국식 스릴러가 관객한테 범인을 함께 추적할 것을 권다. 범인 알아 맞추기 놀이를 원한다면 이 영화는 김 빠진 맥주 같을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범인 맞추기 놀이가 아니라 범인과 주민과의 피할 수 없는 관계를 통해 벌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유머다. 범인이 시체 혹은 앞으로 시체가 될 인질을 처리하느라 바쁜데 초인종이 계속 울린다. 경비원, 부녀회장, 피자가게 배달 청년까지. 범인은 익명성을 간절히 원하지만  "강산 맨션"이란 공간에 사는 한 피자 한 판 시키는 것 조차도 개인 정보 노출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배달 청년은 지나칠 정도나 명민해서 고객의 주소와 전화번호는 물론 주문 패턴까지 기억한다. 피자만 빨리 놓고 가면 될 걸 공짜 피자를 먹으려면 몇 번 주문 더 하면 되는지 세세하게 알려준다. 피자 체인점이야 인터넷이나 자동 주문으로 이런 일이 없고 전화번호나 신용카드로 기억되는 철저한 익명성을 지녔다. 그러나 강산 맨션은 서울 변두리에 있고 피자 가게는 체인점이 아니다. 대형 유통 가게들이 지니지 못한 점을 이 영화는 영리하게 이용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 역시 단골 김밥집 배달 아저씨랑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로 고민하곤 한다. 딱히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면 몰수하는 사이도 아닌 아주 어정쩡한 사이. 배달 청년이 해맑게 이것저것 정보랍시고 수다를 늘어 놓을 때 범인한테 완전 감정 이입.-.-;

 

가방 가게 아저씨(임하롱) 역시 배달 청년과 연장선상에 있다. 아주 그럴듯한 평범한 인물이다. 사람이 갖기 마련인 적절한 호기심과 자신에게 적대적인 이한테 보여주는 소극적 욕설은 매우 사실적이다.

 

2. 또 하나의 흥미로은 점은 힘의 역학 관계다. 범인은 사람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죽이고 토막을 내는 성정의 소유자다. 희생자들은 그의 그런 성정을 두려워하며 살려달라고 매달린다. 그러나 그건 그가 살인마라는 걸 알 때다. 그가 살인마란 걸 전혀 모르는 부녀회장, 특히 사채업자와 그의 대결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반상회 참석과 재건축 동의서에만 관심이 있는 부녀회장은 범죄 현장에 들어와서 커튼을 열어보고 집 더럽게 쓴다고 잔소리까지 한다. 사채업자 역시 자신의 주차 구역에 차를 빼라며 건달답게 주먹질을 해 댄다. 범인은, 자신의 실체를 순간 드러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지만 이따금씩 이성이란 발휘한다. 사채업자의 힘센 주먹 앞에서 공손해지고 부녀회장의 잔소리에 보통 사람처럼 빨리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한다. 싸이코패스를 우리가 잘 알아볼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이럴 땐 보통 사람같으니까.

 

3. 이런 미덕들이 있어 재밌게 봤지만 허전한 구석이 있다. 살인에 대한 쾌락적 탐닉에 대해 아무런 고찰이 없다는 것. 나는 이점에서 원작인 만화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이 부분만 유머러스하게 짚고 갔어도 원작보다 나은 영화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범인이 죽고 경찰이 출동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사채업자에 대한 일반인의 시선을 재밌게 잘 담았다. 김휘 감독 영화를 처음 보는데 감독의 역량이 여기까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4.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가지 서브 플롯이 있다. 계모와 죽은 딸의 화해 과정이 그 하나고, 친구의 논문을 훔치고 들통나자 친구를 죽인 이가 공소시효 만료를 기다며 겪는 도덕적 번민이, 또 하나다. 한국영화는 왜 이런 요소를 제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건지, 궁금하다. 영화 분량상으로 꽤 많이 차지하는데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좀 부족한 분량이기도 하다. 물론 김윤진과 김새론의 연기는 아주 좋지만 극이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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