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언 한 십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유명한 책이나 영화가 어떤 면에서는 비극적 운명이다. 여러 곳에서 회자되는 그 특성상, 마치 누구나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기 쉬워서 진짜로 그 맛을 아는 이가 적다. 다시 보니 난 이 영화를 전혀 보지 않은 것과 같았고, 그러면서 아는 척(?)했구나 하는 일말의 반성을 해 본다.  

 

다른 영화들 보다 이 영화가 제일 좋다. 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때봐서 그랬을까, 아님 의무감에서 봐서 그랬을까. 기억 속에는 그다지 슬픈 영화로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본 영화는 많이 슬펐고, 애잔하다. 성장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13살의 장 피에르 레오는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가출해서 친구 집에서 장기놀이(?)하면서 시가를 입에 물고 포도주 병을 나발부는 모습과 점퍼의 깃을 세우고 헝클어져서 삐죽 일어난 머리를 한 채 늘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불량 소년은 귀엽기만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권과 부모의 권위적 작태는 동일한가보다. 아이의 비행을 감당하지 못한 부모든 사랑을 더 주는 대신 소년원을 택한다. 냉정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낯선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아이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또는 방법이 쉬운 일은 아닌 것을 주변에서 보고 듣는 요즘이다. -2006년8월에 보고

 

2012년7월에 보고

트뤼포 영화 중 제일 좋아하는 영화인데 (기억이 맞는 지 자신 없지만) 필름으로 처음 본 거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자전적 영화다. 계부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엄마와 함께 사는 꼬마.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쟁이 취급 당하는 꼬마. 그럴 바엔 통 크게 거짓말을 해 버린다. 살아 있는 엄마도 죽었다고 하고 뺨을 맞고 뺨을 맞아도 울지 않는 꼬마. 발자크를 탐독하며 숭배하는 꼬마. 조금만 들여다보면 꼬마는 별스러운 게 아니라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을 못 만난 게다.

 

많은 성장 영화가 아이의 순진하고 감상적 시선을 택하는 전략을 취하는데 이 영화는 감상적이지 않다. 어른 세계의 질서에 복종 안 하는 어린이들한테 폭력은 괜찮고 어른 세계의 무질서는 아이한테 숨기는 어른의 이중성을 앙트완은 목도하고 어떤 불평도 하지 않는다. 사실은 어른이 어떤 권리도 아이한테 부여하지 않은 탓인데 아이는 일찍 독립을 꿈꾸며 좁은 집만큼 현실을 답답해 할 수 있는 권한만 있다.억압의 상징인 학교를 땡땡이치고 급식비로 회전 놀이기구를 타는 앙투안의 뿅 간 표정을 보고서야 그간 무표정이 억압 때문이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다.

 

가정과 학교가 결탁한 억압의 음모 속에서 앙투안이 할 수 있는 일은 골목을 질주다. 앙투안은 걷는 법이 거의 없이 틈만 나면 달린다. 도망치느라 달리고 좋아서 달리고 슬퍼서 달리고. 달리는 앙투안을 보면서 난 자꾸 고다르의 초기작들이 떠 오른다. 두 사람이 절교한 게 73년 <아메리카의 밤>이라니까 그 전 영화들은 친구답게 많이 닮아 있다. 영화란 공통 분모를 통해 만났던 청년이 시작은 비슷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히 다른 세계를 지향한다. 한 사람은 상업영화라 불리는 영역을, 한 사람은 정치적 실험 영화를 바라본다. 트뤼포의 초기작들은 사회성이 짙은 편인데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패기와 분노 탓이었을까. 아무튼 전에는 어떻게 두 사람이 친구일까, 했는데 이번에 초기작들을 다시 보니 스타일이 다르지 한 때 같은 공간에 머물며 사유했던 이들의 냄새가 배여있다. 트뤼포는 멜로 영역을 탐구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는, 그래서 산만하게 느껴지는 구성을 주로 사용한다. 나는 이 산만함을 자꾸 불안과 초조로 받아들이게 된다.

 

덧. 트랙 인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줌 인을 문득문득 사용한다. 갑작스런 줌 인은 사실 기술적 이유 때문에 사용했을 터지만 앙투안의 흔들리는 심리에 가속을 가하는 것 같은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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