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형제 (보급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일도 지리멸렬하고 책도 영화도 지리멸렬하고 감정도 지리멸렬하다. 모든 게 지리멸렬한 시기인데 필시 내게 문제가 있겠거니 하면서도 지리멸렬을 끝낼 궁리도 하기 귀찮다.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웃음은 희미해지고 대부분 무표정한 채 지내니, 이리 지내서는 안 되겠어서 위안을 좀 얻고자 두꺼워서 미뤄두었던 책을 들었다.
"사람의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 향하면서도 저녁노을이 비추는 생활을 그리워하고, 다른 두 사람은 향락을 추구하지만 저녁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842)
송강이 자살을 하려고 기찻길에 누워있는 동안 송강의 아내 임홍과 동생 이광두가 정분이 나서 육욕에서 허우적거리는 대목에 들어있는 글이다. 위화의 소설은 작가의 판단이나 주관을 나타내는 말이 거의 없는 편인데 이 장면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목이 메이는 구절이다.
위화의 소설은 아주 사실적이다. 누군가는 얻어 맞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배를 곯지만 당사자 외엔 모두 잘 산다. 사람이 살아가는 건 희비극을 넘나드는 일로 누군가는 비극적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희극적 인물, 다시 말하면 지극히 현실 타협적 인물들은 가지 각색 모욕을 견딘다. 형제에 등장하는 비극적 인물은 송범평과 그의 아들 송강이다. 이들은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고 자신의 자존감을 죽음으로 지켜낸다. 위화가 두 사람의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은 꺼이꺼이하는 울음 속에서도 희죽거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문화대혁명 기에 송범평이 맞아 죽을 때 콘택트 렌즈 착용한 걸 잊고 눈물 때문에 눈물을 손으로 훔치다 렌즈가 돌아가기도 했다. 부전자전으로 송강 역시 그 아비를 닮아 고지식한데 세월과 생활고로 젊은 날의 총기가 사라지고 아내 임홍을 위해 개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송범평과 송강 이외에는 대체로 희극적 인물들인데 그 때 그 때 잘 적응해서 문화혁명기도 잘 넘기고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중국사를 버텨낸다. 송강의 배다른 형제 이광두는 배짱 하나는 두둑해서 자본주의의 개척자로 거듭난다. 언뜻보면 양아치과(?)이기도 한데 의리파다. 이광두는 자신이 계획한 일을 그럴 듯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추진력도 갖췄다. "처녀미인선발대회" 에피소드는 아주 해괴하지만 핍진성이 있다. 처녀 미인에 대한 사람들이 품는 심리를 이용해서 마을 전체를 사업체로 바꿔 버린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어서 사기꾼도 꼬이고 처녀가 순정을 바치는 일도 일어난다. 사람이 모이면 성격도 드러나서 마을 사람들의 활약도 재밌다.
전체적 에피소드는 "니밀헐"하게 어둡지만 그 모든 일에도 세상은 돌아가고 살아 남은 사람은 산다. 그것도 아주 잘. 누군가한테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똑같지만 누군가한테는 과거는 전설이 돼 버리고 또 누군가한테는 과거는 향수가 된다. 모두에게 미래는 불확정적이고 현재는 거나하게 술 한 잔 걸친 것처럼 부산스럽고 우아하지 않다. 비틀거리며 온 힘을 다해 밤 길을 똑바로 걸으려는 취객처럼 현재가 다가 온다. 위화의 인물들과 며칠 간 울고(정말 많이 울리는 책이다) 웃으며 내 현재를 잘 추스려보자, 하면서 책장을 덮었다.
일하기 싫은 병에 걸렸고 그럼 뭐 하고 싶은 게 있냐하면, 그렇지도 않으니 내가 갈짓자로 걸어도 아무 상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가 현재로 바뀐 날, 과거가 될 내 현재를, 나는 분명히 마뜩잖게 여길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똑바로 걸어 보려고 노력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