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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오스트리아는, 내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온다. 쇤브룬 궁 정원에서 누릴 수 있는 양 옆 가로수가 아치를 만들고 저녁이면 공원에서 왈츠가 울려퍼진다. 송이 꽃을 파는 이도 성장을 해서 팔에 가득 안고 있는 꽃이 팔 꽃이 아니라, 꽃 파는 이가 애인에게 선물 할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어울린다. 오스트리아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이렇게 말한다면,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닥쳐, 너는 그저 이미지에 홀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속아 넘어가는 아둔함만을 소유했다고, 조롱할 것이다.
부모님과 형의 부고장을 받고 장례가 치뤄지는 삼일 간의 심경을 500페이지에 걸쳐 적고 있다. 화자 무라우는 볼프스엑이 고향인데 식구들이 본거지로 삼는 고향, 특히 식구들이 추구하는 물질적 성향을 추악한 것으로, 거침없이 묘사한다. 어머니, 아버지 욕으로 책을 시작해서 볼프스엑에 영향력 있는 가문인 자신의 집안을 천박하다고 묘사한다. 자신의 집안을 지배하는 물질성을 공격하면서 무라우는 세상을 물질계 대 비물질계, 즉 정신계로 보고 물질계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가치에 대한 동경과 열망에 대해 무라우는 혐오와 경멸을 서슴지 않고 표현한다. 기존 질서와 기득권에 대한 반항인데 모든 물질적인 것을 소멸로 수렴한다. 소멸은, 발화의 일종인,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500페이지 전부 경멸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이루어져있고 비트겐슈타인의 친구가 아닐까, 하는 문장도 종종 보인다.
"그들이 시류에 부응하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고, 이런 믿음에서 행동하며 종종 그들 시대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다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소수나 소수의 그룹도 다수보다 더 시류에 부응할 수 있고 종종 다수보다 훨씬 더 시대에 부응한다. 대개 항상 그러하며, 개별적인 인간도 다수보다 더 시대에 부응할 수 있고 근본적으로는 시대에 가장 부응하는 인물이 될 때가 많다. 불행은 언제나 오직 다수에 의해 야기된 것이며, 오늘도 울;는 불행을-만약 이런 것이 있다면-다수의 탓으로 돌린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소수 혹은 개인은 다수에 비해 훨씬 더 시류에 부응하며 행동한다는 이유에서 다수의 압력을 받는다. 시류에 부응한 생각은 언제나 시대에 부적절한 생각이다. 시대에 적절한 생각은, 실제로 시대에 적절한 생각인 경우라면, 언제나 당대를 앞지른다고, 하고 나는 생각했다. 따라서 시대에 적절한 것은 으레 시대에 부적절한 것이다.....시대에 적절한 사람이다 함은 생각에서 앞질러 간다는 뜻이지 시대에 부응하여 행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대에 부응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시대에 적절치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82)
이 소설은 1986년에 발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가 발표되었다. 두 소설은 공통점이 있다. 두 작가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문체가, 요즘 같이 추운 계절에 읽으면 체감 온도를 5도 쯤은 거뜬히 내릴 수 있는 서늘한 독기를 품고 있다. 독일 문학과는 분위기가 또 다르다. 뭐랄까, 독일 문학이 패배자의 분위기와 자조가 느껴진다면 두 작가의 작품은, 이 보다 더 할 수 없이 냉랭하고 냉소적이다. 냉소 속에는 이미 기득권만이 볼 수 있는, 은밀한 구석이 있다. 기득권층에 소속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감수성이 드러난다고나 할까. 달랑 두 작가의 대표작두 권만 읽고 오스트리아 문학을 단정할 수 없겠지만 80년대는 한국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도 찬바람 부는 시절이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