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무렵의 역광을 받으며 두 남자가 탄 차가 아스팔트 위를 달린다. 가도 가도 건물 따위는 안 보인다. 보이는 건 황토색 흙과 듬성등성 난 나무들. 가끔씩 말 없는 두 남자의 정면 샷이 보인다. 그들의 머리 뒤로 숨 넘어가기 직전의 황금볕이 눈부시다. 이 오프닝씬이 5분 이상 지속된다. 아무 일이 안 일어나도, 이 영화는 틀림없이 좋은 영화라고 속으로 생각한다.(역시 그랬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참담함이 처음에는 거짓말 같다. 길을 잃었다고 인정하기에 자연은 너무 아름답다. 사람들이 다 가는 길과 반대편 길을 택한 결과가 사막 한 가운데서 생사를 넘나들 운명이라는 걸 두 사람은 몰랐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사방은 비슷한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걸어도 걸어도 모래는 똑같다. 물이 있는 곳으로 가야할지 대로가 있는 길로 가야할지 절박한 건 둘 다인데 갈팡질팡이다. 두 사람이니 의견을 모으지만 결과는 낭패다. 시간은 흐르고 입은 바싹 마르고 체력은 고갈상태다. 그래도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힘겹게 한 걸음씩 전진한다. 어떤 최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 채.
아, 일상의 고통도 이렇지 않을까. 매일 무한 반복되는 일과 가끔씩 다른 가지를 뻗은 나무들처럼 벗어나고 싶다는 압박감 속에서 벗어날까봐 두려워서 꼭 움켜쥐고 있는 일상. 정작 자신을 옭아매는 건, 그러니까, 자신이다. 일상의 속성은 반복성 때문에 지루하면서도 관성의 법칙으로 궤도를 벗어나면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 게 아닐까.
나는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일상성이 가져다주는 권태와 우울을 봤지만 동성애자인 감독은 아마도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비극을 담지 않았나 추측해봤다. 감독이 아니라면 할 말 없지만 분명한 건, 감독은 카메라의 속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카메라를 펜으로 삼아 내면일기를 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서사나 미장센이 영화에서 빠져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객이 느끼게하는 데 천재성을 발휘한다.
덧. 영화 속에서 게리가 아니라 제리라고 부른다. 우리말 표기법이 '게리'로 굳어져서 게리라고 했나본데 아이러니하다. 영화 속에서 제리라고 하는데 게리란 타이틀은 다른 영화같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