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이름이 없다
위화 지음, 이보경 옮김 / 푸른숲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화를 처음 만난 건 <허삼관 매혈기>를 통해서였다. 허삼관이 워낙 매력있는 작품으로 여운이 강해서 위화의 다음 책들을 읽는 데 사실, 적지않게 방해가 됐다. 허삼관의 포스를 자꾸만 떠올리니 그럴 수 밖에. 단편 모음집은 기대치를 낮추자고 주문을 외워댔다.  

역시 대가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분량이 문제가 아니다. 장편 이전에 대가의 싹이 보인다. 단편들에서 엿볼 수 있는 세계관은 놀라울 정도로 허무하다. 불운에 마주치기도 하고 죽음도 흔하고 사랑도 잿빛으로 바래서 낡은 사진같은 느낌이다. 삶의 질곡을 소란스럽게 한탄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어떤 운명이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건을 비약적으로 생략하고 상황을 사진처럼 묘사하는 문체는 차분함을 더해준다. 예상치 못한 불운을 살다가 마주쳤을 때, 고통을 호소하는 심리가 아니라 고통을 대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 의연한 자세 때문에 낙관을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불행을 비웃는 냉소가 아니라 불행을 가만히 성찰하는 관조를 앞으로 배울 수 있다면......그러나 사람이 과연 글 속에 드러난 문체처럼 살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