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7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김현창 옮김 / 범우사 / 1997년 9월
평점 :
품절


이 얇은 책을 읽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숨에 읽히는 서사중심의 소설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완전한 사상적 철학서도 아니다. 이런 어정쩡한 구조는 당혹스러웠고, 반복해서 같은 구절을 읽었다. 결론적으로 파올로 코엘료의 명상적 분위기가 자꾸만 떠오른다. -.- 그쪽 지방의 분위기인가...

금시초문인 우나무노의 안개를 선택한 데는 지극히 즉흥적이고 몽롱한 표지가 압도적 작용을 했다. 19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20세기 초까지 살았던(1864-1936) 우나무노의 정신세계를 달랑  책 한 권 읽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 <안개>에서 보여준 가치관은 전근대적이다. 전체적 줄거리는 아우구스또를 중심으로한 애정관과 결혼관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애정관과 결혼관이란 것이 우아한 문체로 조용한 울림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어찌나 전근대적인지 우아한 문체가 아니였다면 중간에 책을 덮었을 것이다. 여성주의자도 아닌 내가 보기에도 이 정도일진대 가부장적 사유를 보면서 세상은 참으로 넓구나를 되뇔 수 밖에 없다.

"여성에 관한 유일한 심리적 실험은 결혼이야. 결혼을 않는 자는 심지적으로 여성의 영혼을 체험할 수가 없어. 여성 심리학 혹은 산부 심리학의 유일한 실험은 결혼이야."라든가 "(여성) 두 명은 안 되지요. 절대로 안 됩니다. 한 사람으로 만족치 않는다면,...최소한 세 사람이어야 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작가의 여성관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자가 자기 약속을 지키도록 돼 있는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그건 남성적인 것이 아닐까?"물론 이 말은 여자가 한 말이지만 남성관과 여성관에 관한 근본적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동적인 문구들도 있다. "사람이 아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크게 화를 낸다거나 육체적 욕망을 불살라 일으키지 않고는 자기 부인의 육체를 만지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서로 익숙하다 보면 결국은 자기 손으로 부인의 살을 만지는 것이 자신의 살을 만지는 것과 똑같은 무감각한 상태가 온다. 그러나 만일 부인의 살을 떼어 낸다고 하면 그건 자기 몸의 살을 떼어 내는 것과 똑같은 무서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거야."

비단 부부 사이에만 해당하는 원칙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한다. 호감 있는 상대에게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해서 사귐의 단계를 거쳐 익숙해지면 그 관계는 권태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안다는 가정하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그리고 나중에 깨닫는다. 그 사람 얼마나 소중했는지. 익숙한 사람에게 잘 해야하는 걸 알지만 우리는 어리석게도 관계의 시작점에 있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소비한다. 자, 둘러보자, 내가 소홀하게 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요즘은 미래를 건설하는 책보다는 현재를 연소하는 책을 주로 읽고 있다. 고로 나는 변했다, 고 주변에서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미래는 희망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애써 피하고 있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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