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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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쿤데라가 말하는 향수의 정의를 보자. 향수란 그리스어로 귀환(노스토스nostos)와 괴로움(알고스algos)라고 한다. 라틴어로는 이그노나레ignorare. 어원상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고통이란 향수에 대한 고찰, 쿤데라가 말한대로라면 '무지'에 대한 고찰이 책 첫 부분에 등장한다.

 왜 그는 도입부에서 이런 어원적 설명을 몇 페이지에 적어놓았는가. 쿤데라가 말하고자하는 바가 함축적으로 다 들어가 있다. 이 소설의 표면적 줄거리는 68년 8월 소련군이 체코 침공 후, 각각 프랑스와 덴마크로 망명한 옛 연인이 프라하를 다시 찾는다. 이레나와 조제프. 이레나의 남편 구스타브와 이레나의 엄마의 소통. 다각 구도의 사랑이야기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이란 기억과 추억, 망각으로 이루어지고, 역사 속에서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말하고 있다.

 그들이 조국을 버리고 찾아 떠난 것은 무엇인가?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거창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기억 속에는, 심지어 일기장이란 기록에도 그런 역사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고,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을 대하는 가족의 반응은 무관심이다. 그들은 그걸 모른다. 이제 이방인으로서 여겨지는 이레나와 조제프의 휴식처는 어디일까, 하고 의문을 갖게 한다. 조제프는, 체코에 머문다면 덴마크에서 살았던 사랑과, 기억을 잃게 되고 사라질거라는 생각을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란 정확히 규정하기 힘들정도로 유기적이다. 과거란 기억에 의지하며 기억이란 과거에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일부만을 간직할 수 있을 뿐이다. 미래는 영원, 즉 과거를 불가능하게 하며, 현재에 대한 집착은 기억들을 쫓아내고, 또 누군가에게 미래란 지극히 추상적이서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시간을 아는 것이다. 시간을 아는 것은 삶의 편린을 자신의 뒤에 던져두고 그것을 되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줄 아는 것이고, 앞에 주어진 삶의 편린을 사랑하는 것. 결말에서 조제프가 스웨덴으로 떠나고 엄마를 피해 도망쳤던 이레나가 구스타프를 엄마한테 잃는 것은 그들이 바로 현재를 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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