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 수업내 노고산의 나무들이 기다리던 봄을 접고 서서히 흰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풍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봄에 내리는 폭설은 북국의 한 나라 혹은 흰 마녀가 지배하는 나르니아에 온 듯한 공간의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흰 눈의 높이만큼 세상 모든 것들은 제 존재의 몫을 장구히 드러내며 서 있었고 하늘의 전깃줄, 나뭇잎새 하나, 가느다란 생울타리... 그것들이 내가 몰랐던 어제도 제 자리에 있었고, 내가 곧 잊게 될 내일에도 있을 것임을 알게 했다. 그리고, 20살에 가장 좋아하던 가난한 시인의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를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자가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2004.3.5. PM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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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스 2004-03-2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때까지는 하염없이 눈이 오는 풍경 위로 감상에만 젖어있었다. 눈이 많이 와도 천재(天災)라는 걸 추운 나라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미처 몰랐다. 몇 시간 뒤 무너진 집과 비닐하우스들을 보며 이 시를 떠올리고 있던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