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창비아동문고 17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강일우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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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드그렌의 동화 몇 편은 '과연 이것을 아동문학이라고 분류해도 좋을지, 어린이들에게 혹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을지'하는 논란에 싸여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 책은 그 논란의 정점에 있는 작품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하나 둘 읽어가다 보니 이런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는 바로 그의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모더니즘'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가 모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모더니즘'을 과거의 문법에서 확연히 전환되어 현재 우리의 삶과 지평을 같이하는 쯤이라고 규정해 보자면 그렇다.

동화는 근대의 문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아직까지도 '계몽'의 대상이고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방향모색에 대한 고민이 많은 까닭 역시 근대의 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하지만 린드그렌의 동화는 다르다. 그의 동화에서는 착한 아이도 있고 나쁜 아이도 있다. 어른들의 구박을 받는 어린이는 신데렐라처럼 왕자님을 만나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욕설을 퍼부음으로서 진정한 '개인'의 면모를 획득한다. 옹기종기 난로가에 얌전히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지어내 어른들을 속인다. 친구의 죽음에 몇날 몇일 눈물 흘리는 신파에서는 멀리 떨어져 그 죽음을 금세 잊고 만다.

그의 동화에서 어린이는 진정 '개인'으로 태어난다. 더이상 '계몽'의 영역에서 비주체적으로 길러지고 교육당하지 않는다. 만약 린드그렌의 동화가 '아동문학으로서 적절한가' 하는 논란에 휩싸인다면 그 지점에는 근원적으로 어린이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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