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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해 본 일이 없다.몇 년 전인가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가 '별 쓸데 없는 생각이나 하는 이상한 놈...하여간 웃기는 놈' 이라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들은 마치 전어 사이에 끼어 있는 광어를 보듯 나를 봤던 기억이 난다.
거슬러 올라가자.짧은 머리를 왜 '스포츠'라고 하는 지 궁금했던 중학교 시절이다. 밤을 잊는 애들을 위해서 별이 빛나는 밤에도 술자리에 가지 못한 DJ들이 궁시렁 궁시렁거리는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형광등에 불빛이 깜빡깜박이 듯......문득..... '나는 나인가? 내가 나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뺑덕어멈 인당수에 빠지는 생각이 떠올랐다.당시 생각은 바나나 밟은 자전거 마냥 갈피를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나는 현재 라디오 앞에 앉아 졸음 겨워 하는 내가 어느 상위 존재가 움직이는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 상위 존재는 지구로 부터 수 천 광년 떨어진 어느 별에 살고 있는 존재이다.그 생물체가 지구인보다 고등존재인지는 중요치 않다.그 별은 지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거기에는 하위 존재인 나를 규정하는 나와 똑같이 생긴 '진짜 나'가 존재한다.그 우주 먼 곳의 '진짜 나'의 행동을 나는 그대로 따라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그가 오른 팔을 뻗어 라디오 볼륨을 높이면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지구에 있는 나 역시 오른 팔을 드는 것이다.실제 500광년의 시차가 있겠지만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어쩌면 이미 '진짜 나'는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거기까지 생각하긴 싫었다.결국 나는 우주에 있는 '진짜 나'의 반대로 비춰 같은 모양이 된 거울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당시 나는 나의 존재가 좀 부질없다고 느꼇으며 이것이 짧은 백일몽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공포스럽기도 했다.
상상력이 빈곤한 주변의 모범적인(?) 사람들만 제외하면 이런 엉뚱한 생각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그런데 왜 이렇게 주변에는 모범적인(?) 인류만 있는지 모르겠다.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그 인류들도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는 가정이다.단지 기억의 저장탱크가 현저히 낙후되어 떠올리지 못하고 있거나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그딴 강아지 풀뜯어 먹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어른스러움의 표시라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어쟀거나 이런 누구나 하는 희안한 상상을 한 사람은 고금의 역사를 모래알처럼 많았다.조금 더 나이를 들어 '호접몽'의 장자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우주에 있는 '진짜 나'를 다시 한번 쯤 떠올렸다.장자는 내 엉뚱한 상상이 결코 비정상적인 정신건강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 예였다.이미 수 천년 전에도 잠결에 '나비와 나'를 혼동했던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나의 자아는 타인의 자아이다'라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들뢰즈가 그랬던 것 같은데...라캉이었던 것 같다.잘기억나지 않는다.그는 '자아는 자신을 오인함으로써 성립한다'라고 했던 것 같다.이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해방감을 느꼇다.'자아찾기'가 생의 과제 인 것 처럼 받아 들여지던 청년기를 넘긴 시점이었다.흙벽에 막혀 있던 물꼬가 지난 밤의 비로 무심하게 넘는 것을 본 느낌이었다.하지만 함부로 이 느낌을 함부로 전달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았다.
비교적 최근일이다.젊은 여성의 자아찾기란 문제를 가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여직원에게 이 말을 인용했다.'나의 자아는 타인의 자아이다.'라고 말이다.(내게 중요한 느낌의 말이었지만..결론적으로 나의 실수였다.) 한마디로 '쥐약 살짝 발라 드신 분' 취급당했다.그 친구의 말은 일목요연했다. '내가 내가 아니면 누구에요? 그럼 여기 있는 내가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요? 하여간...@@님은 이상하다니까 특이해..(약간 경멸의 목소리를 담아서) '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도 잘 모르는 말을 순간적으로 꺼낸 것을 후회하면서 또한 '나는 어쩌면 나를 구성하는 조각들의 합이거나 조각들의 화학적 변용일지도 모르지 않나..그 조각들은 결국 타자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구...또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일 수도 있구..정말 내가 나일 수도 있지만 '혹시 내가 타인이 아닐까 ?' 생각해보는게 그렇게 치명적인 일일까' 정신병자 니체는 과감히 '주체는 허구이다'라고 약먹는 소리를 했는데.(하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정신병원에 갔겠지.)
철학에 대해 그다지 깊지 못하다.근대철학의 기점을 대개 데카르트의 '고기토'에 둔다는게 정론인 듯 싶다.부정의 부정을 통해 '생각하는 존재'라는 마지막 추출물을 얻었다,그리고 이 데카르트의 생각은 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지배적으로 작용한다.그래서 그런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자아찾기'를 그 시기의 핵심과제인양 설명한다.'자아'를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 수행평가와 수능문제집만 펼쳐준다.데카르트의 문제는 '타자'에 있었다. '타자'라는 존재는 이 데카르트에 있어서는 배제되어 있는 듯하다.타자는 자기 존재의 대척점에 서있다.타자는 결국 자기 존재를 통해서만 재인식되는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현대 철학의 어떤 분파는 타자론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복원에 공력을 쏟는다.자기 존재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는 타자의 존재는 사회적으로 타자화된 소수자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도 발전하게 된다.(.(나는 철학이 전공이 아니기에 그저 상식 수준에서 기억나는 대로 말할 수 밖에 없다.더 공부 많이 한 분들이 더 공부 많이한 방식으로 이야기해주는 글들이 있으니 그게 도움이 될 듯하다)
더 복잡한 건 잘 모른다.그저 내가 찾고자 했던 '자아'가 어떻게 해도 나의 것에만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며 '자아찾기'의 덫에서 빠져나왔다는 것 밖에...또는 내가 찾는 자아라는 것이 내겐 유니크한 무엇인지 모르지만 사실 별개 아니라는 생각까지...어쨋거나 지금은 '나는 나'라는 방식의 차이짓기가 별 의미가 없다는 쪽일 뿐이다.(물론 '나는 나'이며 우주라고 주장해도 별로 할 말은 없다.)
<하얀성>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을 찾은 방랑 노인 에블리야의 말은 이렇다.
(그는)우리는 이상하고 놀라운 것을 우리 마음속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고 말했다.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도 이것이라고 했다.'
호자가 찾고자 했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꾸어버릴 그 깊은 진실'은 찾을 수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주인공 나는 그 하얀성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자는 노예인 주인공을 알고 싶어한다.주인공이 가진 지식에 대한 전수에서 시작된 호자의 탐구는 한 인간의 존재-기억 자체에 대한 근원적 소유를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그들은 서로 대화를 하고 부끄러움을 나누고 두려움을 공유한다.이러한 탐구를 통해 호자가 얻고자 했던 것은 나를 포함한 존재의 근원적 진실이다.그러나 존재의 진실은 파디샤의 군대가 결코 넘어뜨릴 수 없었던 '하얀성'처럼 완벽한 접근을 거부한다.호자의 존재의 진실에 대한 강박은 사냥여행에서 극에 달한다.그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인공을 만났을 때 처럼 질문을 한다.'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말이다.극한 탐구는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진실을 요구한다.그러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존재의 근원이 기억과 습관을 바꾼다고 이루어진다고 생각되진 않는다.이 책은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며 이 글을 쓴 이가 호자인지 노예 주인공인지 모호하게 만들었다.이것에 집착하다 보면 안풀리는 퍼즐처럼 앞뒤를 맞추어보고 싶은 끝없는 욕구에 지치게 된다.그러나 나처럼 성의 없는 독자에겐 처음부터 그런 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일종의 '이중성 인격 ' '도플갱어' 식 캐릭터를 도입하고 있다.지킬과 하이드 처럼 동일 인물의 이중성과는 다르게 다른 인물의 동질화과정을 그린다.결국 동질화는 또다른 형태의 분화를 낳는 형식으로 소설은 발전한다.결말 부분에서 한번의 뒤틀림을 통해 주체와 대상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소설의 캐릭터들을 어떻게 보는냐에 따르 두가지 설정이 가능할 듯 하다.하나는 '호자'와 '나'를 비슷하게 변해 가는 다른 인물로 보는 방식이다.또 다른 하나는 소설 속 '나' 또는 '호자' 라는 인물 내부의 충돌로 보는 것이다.물론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하면 어느 설정이 설득력이 있는지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내가 무슨 비평가도 아니니 그렇게까지 수고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단지 소설을 본 독자의 또다른 상상을 통해 가능한 일을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다.작가가 불쾌하다고 내게 메일을 날리지만 않는다면-설령 날린다 하더라도-책을 읽고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모든 것이 호자(또는 나)의 상상이 만들어낸 즐거운 이야기라면 주체/타자는 동일 인물 안에서 서로 대화하고 갈등하는 형상이 된다.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본다면 주체 내부에서의 권력관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호자와 나 사이에는 분명히 주인과 노예라는 외부적 권력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그러나 그 권력은 결코 일방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노예의 자아는 지속적으로 주인의 자아를 비웃고 시비걸고 그 밑바닥을 드러내도록 독려한다.자아를 인격화한 우를 범하고 있긴 하지만 자아 내부에서 발생하는 -외부와 절연된-권력관계가 있을까 하는 또다른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오르한 파묵이 가진 지역적 특이성이 이 책을 '동서양의 문화적 충돌'이라는 사회적 측면으로도 읽게 한다.즉 노예로 상징되는 서양/호자로 대표되는 동양.....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것.결국에는 구분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서로의 세계 속에 동화되어 가는 것.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보다는 자아/타아론적 관점에 더 마음이 끌렸다.물론 터키 작가가 가진 사회적 환경이 자아/타자의 문제에 더 천착할 수 있게 만든 토양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익히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야 파묵을 접했다.터키 이스탄불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언제쯤 가능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