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 하루키가 말하는 '내가 사랑한 음악'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0여년 전 쯤 기억이다.몇 몇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루키를 닮았다고 했다.당시 나는 하루키를 접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래서 그 말이 칭찬인지 놀림인지 알 지 못했다.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서점에서 그의 사진을 보았다.그 사람들이 한 말은 분명 외모를 뜻한 것은 아니었다.하루키와 나는 제비와 참새처럼 확연히 구분된다.
남들 보다 늦게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왜 독자들이 열광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그의 재즈에세이도 보았다.그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내가 어디가 하루키랑 닮았지?'라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내게 유리한 쪽으로 그 유사성을 찾아보고자 했다.나는 당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던게 두가지 이유에서가 아니었나 하고 추론해 본다.하나는 음악에 대한 '잡식성 성향'이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도 나오지만 하루키의 음악감상은 j-pop(물론 그가 열심히 듣는다고 하진 않았지만)에서 부터 락,재즈,클래식으로 넘나든다.다음으로 추론해 본 것은-이것은 자랑이라 할 수 없는데-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과 비슷한 분위기 때문이다.이런 류의 동질성에 대해서는 사실 나 역시 긴가민가하다.그러나 결코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려운 구석이 있다.뭐라 딱히 집어서 하루키의 어느 소설 ,어느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그러나 내 젊은 날의 방황이 가진 기억 중에는 하루키 소설 속 인물들과 유사한 경험 내지는 비슷한 뉘앙스가 배여있던 것도 사실이다.내 경험에 한정 지을 수 밖에 없겠지만 -하루키적이냐 아니냐로 놓고 보면- 내가 만났던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하루키적'이었던 것 같다.
<의마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는 하루키가 쓴 잡식성 음악 에세이다.등장하는 인물만 보더라도 그의 잡식성 메뉴는 확인된다.재즈 피아니스트 시드월턴,비치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클래식 피아노의 거장 루돌프 제르킨과 아루투르 루빈슈타인,내가 잘 모르는 j-pop의 스가시카오...그리고 마지막은 미국 포크의 원류 우디 거스리... 중국집 메뉴 보다 다양하다는 생각도 든다.(사실 중국집에서 주문하는게 늘 거기서 거기라서 그렇지.실제는 중국집 메뉴가 더 많긴 할 것이다.)
하루키 음악 에세이의 장점-곧 단점이기도 한-은 순음악적 전문 지식이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의 음악계에서의 계급은 애호가이지 전문적인 음악평론가이거나 연주가가 아니다.그러므로 하루키는 인문학적이며 감성적인 음악론을 펼친다. 결코 악보를 들이대며 '32번째 마디부터의 디크레센도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곤란하다.' 는 투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물론 분석적이고 순음악적 평론도 아주 필요하고 중요하다.그런게 없다면 음악이 칵테일바에서 등장하는 여흥을 달래주는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그리고 또한 칵테일용 음악도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여하튼 하루키의 음악론은 그저 음악가에 대해 조그만 사전 지식이 있고 그들의 음반을 몇 장 들어본 수준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하루키 에세이의 또다른 장점은 하루키의 표현력에 있다.같은 음악도 '좋다/나쁘다' 라고 말하고 마는 평범한 수준의 일반 청취자에게 하루키의 표현력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가끔은 '맞아.내가 그 음악을 들으며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하는 류의 대리만족의 경험을 주기도 한다.(그와 반대로 '나는 같은 느낌을 갖고도 왜 이렇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는 좌절감도 동시에 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윈튼 마설리스에 대한 하루키의 평가는 내게 '어쩜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이렇게 표현하고 싶었었는데..' 하는 씁슬함을 건네주었다. 윈튼 마설리스에 대한 하루키의 평가 중에 이런 것들이다.
(윈튼 마설리스는)'이봐요,난 이것도 할 수 있다고요,이런 것도 할 수 있고요' 라는 듯 사뭇 득의양양한 태도가 다소 거슬리게 된다... <스탠더드 타임 vol6 Mr 제리롤> 이 앨범이야말로 윈튼 마설리스의 '공부 증후군'의 좋은 예이다...' 어때? 잘하지?' 라는 메시지만이 빤히 들여다보여 그 결과 어이없을 정도로 깊이가 없는 음악이 만들어지고 만다.그의 오리지널 작품은 역시 들을 만하지만 그 이외의 스탠더드곡의 완성은 정확히 말해 비참하다.....그렇기에 감탄은 해도 감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한 잘 알여지지 않은 피아니스트 시드 월턴에 대한 이런 표현은 정말 압권이다.
(시드 월턴은) 퍼시픽 리그의 하위 팀에서 2루수를 보고 있는 6번 타자 같은 존재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서 새로 알게 된 사람이 스가시키오였으며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 사람이 시드 월턴이었다.시드 월턴의 음반은 복사판이 하나 있었는데 거의 듣지 않아서 있는지도 가물 가물했다.이 책을 보고 카피본 CD를 살펴봤다.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스티플 체이스 레이블에서 나온 음반이다.이 음반에는 4곡이 들어있는데 그것도 마지막 곡은 곡이라고 할 수도 없는 1분 남짓한 멤버소개 테마음악이다.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이 첫번째 곡이다.테너 색소폰 밥 버그와 함께 동일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다.시드 월턴의 피아노 스타일은 하루키가 지적한것처럼 그다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즉흥연주의 피아노 턴이 되면 중용적이면서도 격조 있는 연주를 들여준다.하루키가 칭찬했던<달콤한 모음곡> 에서 역시 네명의 멤버가 서로를 존중하며 제각기 기량을 펼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하루키 덕분에 시드 월턴의 피아노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더 좋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의 곡들은 서핑 음악 말고도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온다.퇴근길에 가끔 듣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도 비치보이스의 비-서핑음악이 간혹 선곡되었던 걸로 기억된다.<펫 사운드> 음반은 90년대에 재발매 되었다.당시 브라이언 윌슨은 이 음반에 대한 라이너 노트를 찍접 썻다.브라이언 윌슨에게 영향을 준 음반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비틀즈의 음반이었다.비틀즈의 음반을 듣고 브라이언 윌슨에게도 무언가 영감이 왔나보다.Don't talk, God only know, Caroline no 같은 곡들에서 초기 비틀즈의 실험성이 언뜻 언뜻 보인다.물론 이 음반에서 국내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민요였던 sloop john B였다 .우리말로 번안되어서 불려지기도 했던 걸로 알고 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에서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하루키의 표현도 재미있다.
브렌델의 경우는 여느 때처럼 지적이며 음악의 논리가 분명하다.이는 물론 바람직한 현상이나 안타까운 건 설정된 논리에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다.네 악장을 통틀어 들어봐도 결국 남는 것은 품격있는 지적인 지루함뿐이다...(리히터,길레스의 연주에 대해) 어디까지나 심각하고 진지하게 농담 같은 건 처음부터 낄 자리도 없다는 듯이 보여 왠지 공산국가의 매스게임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이런 타입의 연주는 오늘날에는 역사라는 서랍장 속에 살며시 넣어두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은 하루키가 말하는 그의 '개인적인 서랍장'에 들어 있는 음악이다.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 만한 그런 곡은 아니다.음반을 뒤적여 보니 다른 슈베르트 소나타들 사이에 딱 한장의 연주가 있었다.에밀 길레스의 리빙스테리오 레이블에서의 연주.다시금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스탄 게츠에 대한 하루키의 편애는 유명하다.따로 언급이 필요없을 것 같다.나같은 경우에는 스탄게츠를 하루키만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전성기 버브 시절 녹음보다 오히려 마지막 음반인 <피플 타임>음반이 마음에 남는다.스탄 게츠의 마지막 녹음이며 또한 투병 중의 연주라는 외적 이유가 더 인상적이기 때문이다.백조의 노래처럼 스탄 게츠는 케니 바론의 피아소 선율에 마지막 색소폰 소리를 얹는다.하루키도 지적했듯이 완벽한 테크닉은 결코 아니다.마치 깁스하고 연주하는 사람같기도 하다.어떨 때는 다음 프레이징을 넘길수 있을까 하고 조마조마하게 만들기도 한다.실제로 연주를 본 사람들은 더했을 듯 하다.마지막 음반에 들어있는 찰리 헤이든의 <퍼스트 송>은 원곡보다 스탄 게츠의 덜컥이는 연주가 훨씬 마음 속 깊이 들어온다.색소폰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여서 코 끝이 찡해진다.오늘처럼 가을 비가 내리는 밤,이 곡을 듣고 있으면 오랫동안 끊었던 담배 한 개피를 들고 창가로 나가고 싶어진다.
루돌프 제르킨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정말 뜻밖의 비교이다.스파게티 집에서 된장찌게를 떠올리는 기분이었다.대개 연주가들의 비교는 하이페츠/오이스트라흐,리히테르/길레스,칼라스/테발디,토스카니니/푸르트뱅글러,파바로티/도밍고...뭐 이런 식이 익숙하다.그런데 제르킨과 루빈스타인이라니...독특하다.물론 비교대상을 누구로 잡냐에 따라서 비교하지 못할 연주가가 어디있겠는가? 제 각가의 특색이 있기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이야기는 만들어진다.그럼에도 제르킨과 루빈스타인을 비교하는 글은 이 책에서 처음 만났다.그래서 신선하다.대개의 피아니스트들은 제르킨과 유사한 철학자,수도자 같은 스타일이다.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또한 연습에 충실하다.음악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갖는다.그 완벽주의가 약간의 기벽으로 보이기도 한다.오히려 음악계에서는 루빈스타인같은 스타일이 독특한 사람이다.루빈스타인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며 대중적 취향에 적당히 야합(?)하기도 했던 사람이다.워낙 한량이어서 노는 것도 좋아했으니 말썽도 많았다.하루키가 이 책에서 언급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는 루빈스타인 스타일을 보여준다.(내가 클래식 음반을 모으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때 샀던 음반이다.)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유들 유들하다.드라마틱한 연주를 즐기는 피아니스트들이 포르테로 힘을 모으는 지점에서도 루빈스타인은 '툭 툭' 샌드백 두드리 듯 치고 지나간다.요셉 크립스의 반주 역시 그다지 용을 쓰지 않기 때문에 밸런스가 크게 무너지진 않는다.제르킨의 연주...하루키가 지적한 바와 똑같은 걸 간혹 느낀다.어떨때는 무척 좋지만 또 어떨 때는 듣기 힘들어진다.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두 장의 음반<리버>와<네브라스카> 는 락팬들이 인정하는 브루스의 최고명반이다.그릭고 풀랑의 음악은 기묘하다.독특한 소스 맛이 나는 음악이다.나는 주로 그의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곡을 즐겨 듣는데 하루키의 초대로 풀랑의 가곡집에도 손을 댈 듯 하다.부드러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려 주었던 제랄드 수제의 음반이 눈에 들어 온다.
하루키의 삶에서 부러운 점은 그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쓰면서 음악을 즐긴다는 것이다.런던에서 하루키는 이렇게 살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중해 소설을 쓰고 지치면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찻집에서 홍차를 마시면서 독서를 하고 날이 저물면 윗도리를 걸치고 음악을 들으러 갔다." ... "상쾌한 일요일 아침 커다란 진공관 앰프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고 (그동안 물을 끊여 커피라도 준비하고) 천천히 턴테이블에 풀랑크의 피아노곡이나 가곡 LP를 얹는다.이런게 하나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 자신도 이런 행복이 모든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치는 않는다고 말한다.그러나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종류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둔다. 그냥 그 상황을 그려봤다.행복해 보인다.좋아하는 일과 자유로움과 음악이 하루안에 빼곡하게 들어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