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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버나드 쇼 지음, 유향란 옮김 / 이너북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음악의 대륙에서 나는 바그너와 반대 편 대륙에 살고 있었다. 자의적으로 구분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나는 기악파다.그렇다고 성악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다. 바흐의 수난곡이나 칸타타,슈베르트,슈만등의 가곡을 즐겨듣는다.또 베르디,푸치니등의 오페라도 듣는다.그러나 음악 대륙에서 패권을 두고 기악파와 성악파가 핏빛 전쟁을 치룬다면 나는 기악파로 투항할 수 밖에 없다.바그너는 성악 쪽에서도 왼쪽 끝에 있는 극좌파다.(그런데 다른 시각으로 보면 바그너야말로 기악과 성악은 물론 드라마까지 총체적으로 이루려한 것 아닌가?) 달콤한 멜로디와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를 가진 모차르트,푸치니,베르디 등이 오페라 우파에 서있다면 바그너는 오페라 좌파의 수장이다.바그너의 뒤를 따르는 오페라 좌파들은 드뷔시,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있을게다.(그런데 써 놓고도 이런 구분이 억지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찾아 다니는 것과 같은 말이다.결국 노선이 달랐지만 나는 바그너에까지 이를 수 밖에 없었다.이제는 잠시 미루어 두었던 그를 만나고 있다.세상은 풍요로운 음악의 보고이고 바그너도 그 중 하나이다.
바그너는 문제적 인간이다.총체적 모순투성이다.남녀간의 사랑을 만병통치약으로 믿는 프로이트 실험실의 연구교재감이다.그의 인간성과 연애행각 대해 길게 논할 바는 아니다.짧게 내 사견을 밝히지면 '딱 내 스타일'이다.내가 별로 매력을 못느끼는 캐릭터들은 스테레오 타입화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가장 나쁜 스트레오 타입화되어 있는 인간은 '남들 하는 것에 별 의구심없이 그냥 따라하는' (형편없는 의미의)일상인이다.좀 더 좋은 쪽으로 보면 그들은 안정감이 있고 타의든 인식하지 못하는 자의든 방향성이 있다고 해 두자...하여간 인간적으로 내 눈에 별로 멋있어 보이진 않는다.바그너는 자기모순의 종합선물세트다.나는 종합선물 세트 같은 인간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단 그의 사적 경거망동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린다. 여자를 등쳐먹든 등쳐먹은 여자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든 알 바 아니다.
역사적으로 바그너 음악과 땔래야 땔 수 없는 사람이 히틀러이다.덕분에 바그너 음악이 오랫동안 편견의 먹물을 뒤집어?그리고 그 먹물의 흔적은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다.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이 금지된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음악이 뭔 죄냐며 항의할 수도 있지만 끔찍한 집단 기억의 악령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그리고 그 충격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해 줘야 한다.
바그너 음악에 대한 일종의 편견은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과도한 애정때문이다.바그너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다.열혈 팬 하나때문에 팬 집단 전체가 욕먹고 그의 음악까지 욕먹는 결과를 낳게 했다.최강의 바그너 매니아 히틀러.그는 <로엔그린>의 백조기사처럼 자신을 인식했다.독일 제국은 물론 세계를 구원할 기사의 운명이 바그너의 신화와 음악속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믿은 것이다.히틀러가 은빛 갑옷을 입고 백조의 기사처럼 분한 그림은 유명하다.히틀러는 레니 리펜슈탈이 찍어 유명한 뉘른베르크 전당 대횡서 '리엔치''로엔그린'의 서곡등을 연주해댔다.제 3제국의 각종 행사에서 바그너 음악은 빠질 수 없었다.1933년 히틀러는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바그너와 제 3제국의 혼을 엮는 행사'라고 말했다.골수 매니아 때문에 '바그너 음악=나치 선전음악' 처럼 이미지화 되어 버렸다.물론 바그너가 반유태주의와 독일 국가주의에 경도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그너를 히틀러와 동일시 해버리는 것은 잘못이다.골수 바그네리안때문에 가장 큰 편견의 감옥에 갖혀 버린게 또 바그너이다.
버나드 쇼가 쓴 <니벨룽의 반지>는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쓰여진 또 다른 바그네리안의 바그너 해설서이다.버나스 쇼는 노벨문학상 수장자이자 대표적인 영국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이다.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짧게 말하자면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개량 사회주의자'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버나드 쇼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기대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가 담은 신화의 의미를 해석한다.버나드 쇼의 독설이 담긴 글쓰기는 당대에도 유명했다고 한다.이 책에서도 그는 독설과 자화자찬의 글쓰기를 보여준다.그러나 별로 미워보이지는 않는다.오히려 촌철살인의 한방을 보여줄 때가 많아서 혼자 큭큭 거리고 웃게 만든다.
책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라인의 황금><발퀴레><지크프리트><신들의 황혼>순으로 줄거리를 소개하고 신화적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근대사회에서 갖는 우의성을 설명한다.(스토리를 조금 알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일단 주인공들에 대한 버나드 쇼의 해석은 이렇다.신들의 왕으로 등장하는 보탄은 질서와 법을 상징한다.그는 이 질서와 법의 집행자이면서 또 예속자이기도 하다.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 보탄은 편법과 새로운 파괴를 구상한다.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과도 같은 존재인 알베르히는 자본가를 상징한다.버나드 쇼는 극에 등장하는 자본가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황금을 움켜쥐고 용으로 변신에 이를 수호하는데 급급한 파프너는 전통적인 농경자본가이다.반면 알베르히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부르주아 자본가이다.버나드 쇼는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했던 바그너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마르크스가 예측하지 못한 알베르히들의 개량 대해 언급한다.즉 성공으로 얻은 자존심과 사회적 존경심은 알베르히가 자신의 성격을 개선해 나간다는 것이다.이 알베르히들은 결국 질서와 법을 상징하는 보탄과 이성과 계략을 상징하는 로게를 장악하게 된다.돈 지갑을 가진 자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된 다고 버나드 쇼는 말하고 있다.그는 알베르히에 종속된 노예들을 근대 시민들로 읽는다.사람들은 난쟁이 알베르히를 마음 속에 품고 산다.그렇기 때문에 난쟁이들이 훌륭하고 제대로 된 존재라고 믿는다.그들이 착취를 통해 여기 저기 해악을 행하고 다녀도 그저 바라볼 뿐 의심하지 않게 된다.버나드 쇼는 알베르히를 통해 배금주의에 빠진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의 착취구조를 읽고 있다.
<니벨룽의 반지>의 히로인인 지크프리트는 그럼 어떨까? 버나드 쇼는 지크프리트를 니체의 초인,또는 바그너와 함께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했던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으로 치환하여 생각한다.즉 현존하는 사회적 제도와 습관 등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가 지크프리트이다.보탄이 자기 모순에 빠진 신들의 세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인간 존재였다.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바로 지크프리트적 존재이다.버나스 쇼는 지크프리트의 상징적 의미에다가 약간의 사회적 옷을 입힌다.바그너읽기의 사회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바그너가 이상적 사회주의자로서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한 것,그리고 그후 12년간의 망명생활을 거친 것에 대해 강조한다.그러면서 지크프리트를 아나키즘적 인간으로도 설명한다.버나드 쇼는 아나키즘의 발전 척도가 그 사회의 정치적 수준을 말해 준다고 할 정도로 아나키즘이 가진 인간화 세계에 대한 혁명에 매력을 느낀다.하지만 어느 것도 만병통치약이어서는 안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그는 다음 장에서 마르크스식의 혁명론에 부정하는 점진적 사회개혁자로서의 입장도 밝히고 있다.
100년전의 바그너 해석이 현재와 같을 수는 없다.음악이나 무대면에서도 그렇고 바그너 텍스트를 해석하는데고 그렇다.전통을 고집하던 바이로이트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또한 헤리 쿠퍼같은 연출가들은 바그너 무대를 미니멀하게 바꾼 현대적 해석으로 이름을 높이기도 했다.바그너의 텍스트 또한 다양한 읽기가 가능하다.버나드 쇼의 사회주의적 해석 역시 그 중 하나이다.설령 그와 같은 잣대를 가지고 바그너를 읽더라도 그의 시간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다르다.그러므로 또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총제적 인간으로서 바그너와 그의 음악이 가진 매력은 그의 음악과 텍스트가 무한대로 열려있다는 것이다.
바그너 텍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음악에 대한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다.라이트 모티브에 대한 설명도 들어있다.또한 바그너 음악이 가진 모티브반복을 통한 구조완결성을 바흐나 베토벤 수준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버나드 쇼의 주장을 발전시키면 베토벤 사후 베토벤 계승 논쟁의 적자는 브람스가 아니라 바그너이다.단 브람스가 베토벤 수호자 였다면 바그너는 베토벤 개혁자였던 셈이다.베토벤이 가진 디오니스소적 성향과 음악적 개혁성에 촛점을 맞춘다면 바그너의 위상 또한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버나드 쇼가 만약 기록 매체의 발달로 집에서도 바이로이트페스트벌을 만날 수 있는 후세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의 독설로는 통조림 음악은 집어치우라고 했을 수도 있다.그래도 그 독설가는 후대 바그너입문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몇 개 남기는 예의는 잊지 않는다.
"<니벨룽의 반지>와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연주나 오락 음악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니벨룽의 반지>음악은 정말 쉽고 단순하다.고리타분한 학교에서 음악을 배운 음악가들이야말로 머릿속에 버려야할 것들로 가득하다.나는 그런 사람들이 일말의 동정심도 얻지 못한 채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둘 작정이다." .....영국의 문필가,바그네리안 버나드 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