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아무도 <미디어 오늘>에 대해 말씀 하지 않아서...생각난김에 쓴다.미디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고착화시키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한다.교육만큼이나 국가(정부)가 생각하는 것을 주입시키는게 미디어다.몇 년 전부터 미디어에 대한 비판 프로그램이 생겼다.나름대로 훌륭한 시도들이 많았다.그러한 미디어 비판에 가장 앞장 섰던 것이 <미디어오늘>이다.원래는 언론노조의 노보에서 시작해서 어느덧 11년을 맞았다.예전에 공부할 때 정기구독했었는데......요즘은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다. www.mediatoday.co.kr

즐겨찾기에 추가하셔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신문이다.....

아빠, 또 오월이에요
[전라도닷컴] 시민군 김영철의 딸 김은형
2006년 05월 18일 (목) 12:05:20 전라도닷컴 남인희 기자

'전라도닷컴'(www.jeonlado.com)의 양해를 얻어 기사를 전재합니다. / 편집자

그 해 오월 그의 어머니는 임신 7개월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폭도'라는 이름으로 옥중에 갇혀 있었다.

   
  ▲ 시민군 고 김영철의 딸 은형씨. 김영철은 80년 5.18민중항쟁 기간에 투사회보를 만들고 도청항쟁지도부 기획실장 일을 맡아 했다. 5월27일 새벽 도청 사수 중 계엄군에 체포된 그는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이상에 시달리다 지난 1998년 숨을 거뒀다. ⓒ전라도닷컴 김태성 기자  
 
김은형. 80년 7월3일 광주 생. 예정일을 훨씬 넘겨 태어난 아이는 2kg에도 한참 못 미쳤다. 인큐베이터에 넣어야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간첩으로 몰려 수감돼 있었고, 이제 아이가 셋인데 집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가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독한 마음으로 금방이라도 목숨이 꺼질 것 같은 아이를 안고 퇴원했다.

아이는 살아났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처음 본 것은 이듬해 겨울이었다. 20년형을 선고받았던 그의 아버지는 1981년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돼 집 앞에 던져졌다.

아빠는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

시민군 김영철.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 지역주민운동을 펼치고 한편으론 들불야학 강학으로 뛰어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순수한 열정을 쏟아내던 청년. 그는 5·18민중항쟁 기간에는 투사회보를 제작하고 도청항쟁지도부 기획실장 일을 맡아 했다. 그리고 5월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었다. 계엄군들은 그의 등에 '선동, 총기소지자'라고 매직으로 썼다.

1980년 10월25일 살벌한 공포 분위기 속에 진행된 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씨를 사형 구형한 군검사들은 자기네들 각본대로 재판을 진행시켰다. 관선변호사들은 변호를 한답시고 "잘못했제" "다음부터는 안 하겠제"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그를 폭도, 빨갱이로 매도했다. 간첩이라는 누명이 억울하고 의동생 박용준, 윤상원 동지 등이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김영철은 상무대 영창 안에서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이때의 부상과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그는 석방된 후에도 머리가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정신을 놓을 때가 많았다. 잠을 자지 않고 사방에 머리를 찧고 엉엉 울었다, 비오는 날이면 옷을 죄다 벗고 골목으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대낮에 골목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느님, 용서해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일이 많았다.

   
  ▲ ⓒ전라도닷컴 김태성 기자  
 
동지는 가고 없는데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그의 정신에 그처럼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신병원 입퇴원을 거듭했다. 그것이 석방된 김영철의 삶이었다.

"아이들이 '너희 아빠 미쳤지' 하는 말이 어린 맘에 상처가 됐어요. 우리 아빠가 다른 아빠와 다르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하는 아빠는 정신이 들 때나, 나갔을 때나 누구에게도 단 한번도 성을 내는 일이 없었다. 은형인 친구들이랑 노는 것보다 집에서 아빠랑 노는 게 재미있었다. 어리지만 아빠를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불렀어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과수원길' '청실홍실'… 아빠가 그런 노래를 부르면 은형인 율동을 했다. 은형은 아빠가 좋았다. 그리고 아빠가 불쌍했다. "아빤 왼쪽 팔, 왼쪽 다리가 저려 많이 고통스러워 했어요."

결혼기념일마다 아내에게 500원짜리 맛동산 선물

과일과 채소장사로 아이 셋을 키우며 '간첩'으로 소문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야 했던 김순자씨. 젖먹이딸 은형을 업고 교도소로 면회를 다니던 김순자씨는 몸도 활발치 못하고 정신까지 온전치 못하게 된 남편을 보고 처음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펑펑 울기만 했다. 나중엔 면회실 앞에서 울부짖고 나뒹굴었다.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저렇게 만들어놓고 내보내 주지도 않느냐"고.

"울 엄마 옛날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나요. 그렇게 순하고 그렇게 여린 사람이 저렇게 억척스런 사람이 됐어요." 정신을 놓고 사는 남편에 어린 삼남매를 키우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여자가 얼마나 간난신고의 삶을 살았을 것인지 은형씨는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한다.

그런 엄마에게 아빠는 1년에 꼭 한 번은 작은 위안을 주곤 했다. "결혼기념일을 한 해도 잊지 않으셨어요. 결혼기념일이면 항상 엄마 가게 금고에서 돈 500원을 꺼내와요. 그리고 맛동산 하나를 사 두었다가 엄마한테 주는 거예요." 누가 아빠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게 전두환이었다. 그래서 어린 은형이 최초로 미워하게 된 사람이 전두환이었다

은형인 아빠한테 떼쓰듯 물어보곤 했다. "아빠를 그렇게 만든 전두환이가 밉지 않아?" 하고. 아빠는 언제나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은형아, 그러면 안돼. 전두환이라 하지 말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해라. 아빠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하나도 안 밉다." 그런 아빠였다. 아빠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모두 정신이상자라고 하는 아빠가 하는 말은 정신이 온전하다는 사람들의 말보다 더 선량했고 더 진실했다.

"온 우주를 사랑하라"던 아빠의 말이 귀에 박혀 지금도 그녀는 '코스모스(우주)'라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은형아 하느님이 지으신 만물을 사랑해야 한다. 제 속에 탐욕이나 불의를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겐 미움 대신 연민을 가져야 한다."

5·18시민군이었던 아빠가 국립 나주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사이, 은형도 면회하러 가는 엄마 손을 잡고, 혹은 약 타러 가는 아빠 손을 잡고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상원이 삼촌, 관현이 삼촌한테서 받은 위안 

   
  ▲ ⓒ전라도닷컴 김태성 기자  
 
아빠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은형은 자주 병실에 갔다. 정신병원에서도 병실에서도 아빠는 늘상 엄마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나 집에 가고 싶어요, 나 안 아파요, 나 안파요, 여보!" 엄마가 자리를 비우면 은형에게도 애원을 했다. "은형아, 아빠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엄마한테 니가 말해서 아빠 집에 데려가자고 해!"

그런 아빠에게 가슴에 못 박히는 말을 하고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딱 한번이었지만 주워 담지 못해서 지금에도 회한으로 남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아빠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죽어버려." 그때 아빠는 웃었다. "허허허! 은영이는 아빠가 죽었으면 좋겄냐." 문을 닫고 나와서 보니  아빠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맘에 없는 소리였다고, 그 말 한 것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 못했는데 아빠가 돌아가셔 버렸다. 1998년이었다.

사람들은 아빠가 전두환 사면 뉴스를 보던 도중 빵을 먹다 기도가 막혔다고 했다. 은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양원이 아니라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병원에만 계셨어도 아빠는 살아 계셨을 거라고 아쉬워하고 또 아쉬워하며 산다. 삶이 허망하고 외롭고 힘든 날 은형이에게 위안을 주는 곳은 망월동 구묘역이었다.

"은형아, 상원이 삼촌 용준이 삼촌 관현이 삼촌 안 죽었다 안 죽었다." 귀에 박히도록 들은 이름들이어서 진짜 삼촌 같았다. 엄마도 그 이름들을, 함께 어울렸던 그 날들을 늘 그리워했다. 

"들불야학 강학들과 아파트 청년, 야학생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면서 '선구자'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같은 노래를 자주 불렀지. 상원이 삼촌은 구성진 판소리와 봉산탈춤을 잘해 인기가 대단했고, 노란 삼베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닌 관현(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삼촌은 각설이타령을, 용준이 삼촌은 가곡을 정말 잘 불렀어. 나는 청실홍실이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는데 상원이 삼촌이 참 좋아했어."

한번 본 적 없이 땅 속에 묻힌 삼촌들이 은형을 위로했다. "우리 아빠를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삼촌들 곁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어요. 상원이 삼촌한테는 편지를 써서 갖다 놓기도 했어요."

몸에 갇힌 희로애락 춤으로 풀어내

다른 아이들은 대개 엄마가 따라 오는 견학에 은형은 아빠 손을 잡고 갔다. 엄마는 장사를 해야 했으니까. 

"아빠랑 같이 소풍간다고 좋아라고 갔는데 버스를 잘못 탔었나 봐요. 거기 도착했더니 아무도 없었어요. 근데 그 날 둘만의 소풍이 잊혀지지 않아요. 날씨가 참 좋았어요. 아빠가 노래 부르고 손뼉치고 나는 율동을 했어요."

아빠 앞에서 율동을 하던 어린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것이 무용이었다. 하지만 먹고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지금은 그 꿈이 이뤄졌다. 늦깎이 무용 공부를 지지해 주는 남편도, 춤을 출 수 있도록 오래 이끌어 준 장경숙 선생님도, 이상준 선생님도 꿈을 따라 가라고 은형을 격려해 주는 이들이다.

춤을 춘다. 엄마의 등에 업혀 교도소에 면회 갔을 때 아빠는 어린 은형을 보았을 것이다. 엄마 혼자 낳은 막내가 아빠한테는 참 짠하고 이쁜 아이였을 것이다. 아빠랑 소풍갔던 너럭바위를 생각한다. "은형아 '국립나주정신병원'(아빠는 꼭 그렇게 말했다)에 약 타러 가자!" 아빠가 말하면 좋아라고 따라 나서곤 했던 어린 날의 나들이를 생각한다.

한을 풀기 위해서 추는 춤 아니다. "내 몸이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 너무 오랫동안 세상의 눈치를 보느라 표현하지 못하는 희로애락을 몸으로 풀어내는 것이 좋다." 중국어를 전공한 은형은 지난해 광주여대 무용과에 편입했다. 박선옥 교수의 지도로 <오월아리랑> 공연에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영상자료물을 모으면서 사진을 고르는데 아빠가 재판 받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아, 우리 아빠다!" 그의 말에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그녀가 시민군 김영철의 딸이란 것을 주변에선 몰랐다. 이 공연에서 그는 희뿌옇게 동터오는 새벽을 응시하는 시민군 중의 한 명이었다. 쇠사슬에 묶여 구르는 장면에서 그때 아빠는 어땠을까 생각했다. 오월의 넋을 씻겨 천도하는 씻김굿 장면에선 아빠의 영정을 들고 붉은 천을 자르는 길을 따랐다. 영정 속의 아빠는 은형의 속엣말을 들었을 것이다.

"아빠가 있어 행복했어요. 아빠도 그곳에선 삼촌들이랑 행복하세요."

※증언자료 <광주여 말하라>(증언자 : 김영철, 조사 정리 : 신봉화)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전라도닷컴 / 남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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