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등꽃 나무 아래/김명인
오늘은 급식이 끝났다고, 밥이 모자라서
대신 컵라면을 나눠주겠다고,
어느새 수북하게 쌓이는
벌건 수프 국물 번진 스티로폼 그릇 수만큼
너저분한 궁기는 이 골목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니라
부르면 금방 엎어질 자세로
덕지덕지 그을음을 껴입고
목을 길게 빼고 늘어선 앞 건물도 허기져 있네
나는, 우리네 삶의 자취가 저렇게 굶주림의 기록임을
새삼스럽게 배운다, 빈자여,
등나무꽃 그늘 아래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며
우리가 무엇을 이 지상에서
배불리 먹었다 하고 잠깐 등나무 둥치에 기대서서
먹을 내일을 걱정하고, 먹는 것이
슬퍼지게 하는가
등꽃 서러움은 풍성한 꽃송이 그 화려함만큼이나
덧없이 지고 있는 꽃 그늘뿐이어서
다시 꽃 필 내년을 기약하지만
우리가 등나무 아랫길 사람으로 어느 후생이
윤회를 이끌지라도 무료급식소 앞 이승,
저렇게 줄지어 늘어선 행렬에 끼고 보면
다음 생의 세상
있고 싶지 않아라, 다음 생은
차라리 등꽃 보라나 되어 화라락 지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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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선생의 2000년 현대 문학상 수상작품이었다.
김명인 선생의 시를 좋아해서 몇 권의 시집을 샀다.조금 관념적인 면도 있지만 그것도 매력이다.
그의 시에는 불교적인 향이 많이 난다.최근의 문태준 시인의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