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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달려라 아비>에는 '청승' 이 없다.생각난 김에 인터넷 검색란에 '청승'이란 단어를 검색했다
청승(명사): 궁기가 끼어 있어 애틋한 상태,또는 궁상스럽고 처량한 듯한 태도.
(속담)청승은 늘어가고 팔자는 오그라진다 :나이들어 살림이 구차하여지면 궁상을 떨게 되며 그렇게 되면 좋은 날은 다 산 셈이라는 말.
동명 단편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이 80년 생 작가는 수 많은 부재와 결핍 속에서도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태어나면서 한 번 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놀이 공원에 나를 놔 두고 실종된 아버지,TV만 보다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아버지... 교통사고로 치마가 훌렁 뒤집혀 죽은 여고생,포스트 잇으로 의사소통하는 여자들... 작가는 '부재'와 '소통 단절'에 대해 무언가 말하지만 결코 '청승'떨지 않는다.8,90년대 작가들은 이런 심각한 주제에 대해 이렇게 '남의 일' 보듯 쓰지는 못햇을 것이다.하지만 아직 10대의 얼굴이 묻어 있는 김애란은 그냥 TV 베스트 극장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 인 양 스스럼 없이 결핍과 단절에 대해 말한다.아마 이 소설 <달려라 아비>가 문단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은 과거 소설의 '무거움'에 대한 안티테제로 '가벼움'을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심함'을 밀어넣기 때문일 듯 하다. 단편<사랑의 인사>의 주인공은 버림받은 아이이다.그는 네시호의 미확인 괴물이 천지에도 나왔다는 뉴스를 보고 자기에게 인사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한다.그는 대형 수족관에 취직한다.거기서 그는 말한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수족관 유리를 주먹으로 쳤다.그것은 물고기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 중에 하나였다.나는 아이들이 (간혹 어른들도 있었다) 왜 유리벽을 두드리는지 알고 있었다.물고기가 자기를 알은척 하지 않았어였다......나는 물고기의 무심함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내가 수조 안에서 물고기와 마주쳤을 때 난감했던 것도 그들의 시건이었다." .... 단편 <사랑의 인사> 중에서
소설집<달려라 아비>의 주인공들은 어린 시절 '정신적 외상'-즉 트라우마 를 경험한다.이 외상에 대한 자기방어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 '무심함'이다.내가 간혹 쓰는 말투로 하자면 '그래..그런데...그래서' 식 무심함이다.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어떤 친구가 가족 이야기던지 애인과 헤어진 이야기던지 개인적으로는 가슴 사무치는 비밀을 이야기한다.뭐 이런 건 어떨까..아버지가 한 너댓명 되는 사람,자신이 입양된 아이인지를 고2때 처음 안 사람....자살 횟수가 손목에 남아 있는 사람...대충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다.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사람들은 두 부류이다.하나는 '야..너무 힘들었겠구나..얼마나 가슴 아팠어.괜찮아' ..눈물까지 조금 글썽여주며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주는 사람이다.또 다른 사람은 진지하게 다 듣고 나서 '그래...살 다 보면 상상 조차 못하는 일들이 생겨나지...근데 그래서' (차마 이런 말까진 안하지만...그래 니가 죽을 고생했다 치자.그런데 그 다음은..) 후자의 경우 정나미 떨어진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하지만 그게 낫다.그건 '무심함'이지 '냉혈함'이 아니다.그리고 말하는 사람 역시 그 '무심함'에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곧 '무심'해 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던지.감정의 설사를 더해주는오버나 쥐뿔도 모르면서 이성적입네하며 정신적 위기를 탈출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말하는 것들은 그냥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게 낫다.
김애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아비 부재의 트라우마'를 '무심함'으로 건너가려한다.하지만 트라우마는 트라우마.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물 밑에 반쯤 가라앉아 언제든 뛰쳐나올 수 있는 불안과 긴장이 내재해 있다.소설 속 주인공들이 때론 수면을 위한 숫자를 세며 때론 잠수복에 머리를 처박고 울며 불며 그 '부재의 강' 건너려 한다.하지만 내 생각에 이들은 그 강을 완전히 건널 수는 없을 것이다.그렇다고 '청승'속에 살지도 않을 것이다.그건 어린 시절 가슴에 입은 화상 자국과 비슷 하다. 사는데 불편함이 없다.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프지도 않다.남들도 잘 모른다.본인 역시 일상을 살다보면 잊고 지낸다.그저 가끔 수영장이나 목욕탕을 가서 옷을 벗을 때 한번씩 떠오르게 돼는 것일 뿐이다.
김애란의 소설은 개인적 경험이 깊숙히 반영된 듯 하다..신인 작가가 세상에서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은 결국 자기 이야기다.그녀가 다루는 아버지의 이야기들 역시 그녀의 개인적 우화에 상상력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소설 속 공간이나 소설 속 가족 관계,일상의 영역등이 작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듯 하다.단편 <노크하는 집>같은 경우 다가구 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소통에 대한 희망과 소통의 불편함에 대한 모순된 감정.....어차피 아무런 교류도 없다.하지만 5개의 방 중 5개가 전부 차있는 저녁 시간의 심리적 불편함,일요일 낮 서너 방이 비어 있는 시간의 자유로움과 홀가분함.화장실 소리에 따라 서로의 동선을 피하는 어색한 배려,일상의 작은 불편에 대한 상호간의 불만. 단편<나는 편의점에 간다> 역시 이러한 소통의 불편함과 소통부재의 두려움을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어도 집 앞 단골 편의점을 이용할 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통과 관련된 우화들이다.
책의 주제는 사무치는 것들이지만 김애란은 적당히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사무침을 희화한다.정작 가장 코믹스러운 부분은 책 뒤에 딸려온 서평이었다.어차피 텍스트에 대한 분석은 자기가 아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어떤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볼 것이고 어떤 사람은 더 세부적인 것을 볼 것이다.또 어떤 이는 직관을 통해 작가의 마음과 닿을 수도 있다.평론이란 작업은 아무래도 지적인 활동은 활동인가 보다.단편 <스카이 콩콩>의 결말 부분에 대해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김애란의 우주적 상상력에는 니체적인 영원회귀와 베르그송적인 생명의 도약이 겹쳐져 있다.'
그가 느끼는 우주적 상상력의 내용은 이렇다.아버지의 성기로 부터 퍼져나가던 불꽃들의 이미지,수족관 안에서 유리벽을 두르리던 손바닥,한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선글라스를 씌워주며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상상력.. 이 모든 것들이 니체와 베르르송의 회귀와 생명도약이다.
나..원...이렇게도 말하겠다. "버스바퀴는 각진 세상을 떠받치는 둥근 원불교의 상징이며 선인장의 가시는 일상공간을 향해 일침을 가하는 선사의 계송이다."
평론가의 말 중에서 이 책의 서있는 좌표를 정확히 짚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좋은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김애란의 소설은 세계와의 소통부재나 소통단절과는 무관하다.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애매성으로 가득한 세상과 마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들은 삶을 번역하며 살아간다.달리 말하면 사회적인 것이 내면화될 때 생겨나는 갈등과 주관적인 의도가 사회적으로 표현될 때의 장애를 그들은 고스란히 경험한다.
이 말을 평범하게 받아 들이면 이 책<달려가 아비>는 성장소설이다.특히 20대 청춘의 성장 소설이다.주인공들도 다 그렇고 그들이 사는 공간도 그러하며 그들이 겪는 고민들도 다 술자리에서 나옴직한 이야기들이다.
결론적으로 ...난 이 책이 쉽게 읽혔으나 ...열광할 정도는 아니었다.이미 그 시기를 지나서인가? 아니면 작가의 개인적 삶의 투영을 너무 의식해서인가? "너 아빠 없니? 그래.. 그런데...뭐.. " 이게 내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