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명 조식 칼을 찬 유학자 - 한국사상가대계 6
이종묵 외 지음 / 청계(휴먼필드)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부산에 내려 오기 전에는 남명 조식을 알지 못했다.그저 이름 정도만 들어본게 전부다.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비해 그의 이름은 전국구라 하기엔 좀 낯설다.하지만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남명 조식은 꽤나 알려져 있는 분이다.이 고장 아이들은 초등학교때부터 '우리 고장의 인물'로 남명 선생을 배웠을 것이다.그래서 진주나 산청 쪽으로 가면 평범한 농사꾼들 조차도 '남명 조식' 그러면 한마디 씩 거든다.안동쪽으로 가면 퇴계에 대해 사람들이 다 전문가처럼 이야기하는 것과도 비슷할 것이다. 퇴계 이황은 국사시간에도 국민윤리 시간에도 배웠다.또 일상생활에서도 언제든 만날 수 있다.지금 당장 지갑을 열면 그의 얼굴을 만날 수도 있다.하지만 퇴계와 동시대사람인 남명 조식은 어떠한가? 그는 성리학의 주류에서 비껴 서있었던 사람이다.또한 왕의 부름에도 끝끝내 벼슬자리를 마다했던 아웃사이더이다.그러므로 서부 경남을 제껴두고 나머지 지역 사람들에게 그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과 진배없다.나의 호기심은 그의 아웃사이더 기질과 이 동네 꼬맹이도 아는 사람을 나는 잘 모른다는 부끄러움에서 시작되었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같은해에 태어났다.한 사람은 경상 좌도에서 또한 사람은 경상 우도에서 그 학문을 떨쳤다.퇴계 이황이 조선 성리학의 태두로 이름을 떨친 반면 남명 조식의 학문은 후대로 크게 이어지지 못했다.대개 남명 조식의 학풍이 이어지지 못한 것을 광해군과 북인세력의 몰락에 두고 있다.잠깐 국사시간에 배웠던 당파 계보를 한번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먼저 조선 개국 공신인 훈구파 부터 시작해야한다.개국 당시 혁명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이 안정되면서 권문세가를 형성한다.이들이 훈구파다.그러다보니 왕은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다. 여말 지방으로 숨어들었던 정몽주,길재들의 학풍을 이었던 선비들이 등장한다.이들이 사림들이다.사림 중흥의 핵심에는 조광조가 있다.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하룻밤의 꿈으로 사라진다.그렇다 하더라도 사림의 정치 진출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선조 때가 되면 동인과 서인으로 사림이 분열한다.동인에서 이황계열인 서애 유성룡,김성일 같은 사람이 후에 남인으로 분류된다.남인 계열은 이후에도 야당세력을 형성한다.이수광,윤선도,정약용 이런 사람들이 남인의 계를 잇는다.반면 동인중 조식 계열로 임란후 광해군의 지원세력이 되는 북인세력이 있다.이들은 광해군때 잠시 빛을 보지만 그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남명 조식의 학문이 세상에 가려진 것에는 이런 역사적 이유도 있다. 동인의 반대쪽에는 서인들이 있는데 이들 서인은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세력이다.이들이 광해군의 북인정권을 몰락 시킨후 조선 말 세도정치가 벌어질 때까지 정권을 쥔다.서인 세력 역시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송시열의 노론계열이 적자임을 자부한다.
남명 조식의 학문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남명 철학 자체에 있다고 한다.남명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배격이다.그는 도를 세우는 길이 간명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했다.남명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을 배격하고 오직 <마음의 자기조명>만을 강조했다.맹자가 말한 "학문하는 도는 다른 것이 없다.놓아 버린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라는 것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이 마음을 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극기였고 경과 의의 실천이었다.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쇄소응대의 철학'-즉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실천하는 것이었다.남명은 이기담론에 몰두하는 것은 '당나귀 가죽에 기린의 형상을 뒤집어 씌운 것처럼'겉은 화려하고 풍성해 보일지 모르나 속은 볼품없이 초라하고 너절해다고 비판했다.또한 실천적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물건은 사지 않고 흥정만 하다 떠다니는'것 처럼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퇴계 이황은 상달의 세계-즉 도의 세계-에 중심을 두었던 반면 남명 조식은 하학의 세계-즉 일상의 세계-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남명이 일상영역과 지행합일을 목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에 양명학의 전통과 맥이 닿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고 실학의 선구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양명학이나 법가의 전통에 닿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학의 실사구시와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처럼 보인다.
남명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과 의이다."경과 의를 함께 가지면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내짐에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잇는 것과 같다.만고에 걸쳐 바뀌지 않을 것이며,성현의 천가지 만가지 말쓴도 그 귀착하는 요점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퇴계는 경을 성을 이루는 실천방법으로 설명하지만 남명에겐 겨의 실천을 위한 극기를 권한다.성과 경의 문제는 조금 형이상학적인 논쟁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하지만 남명이 말하고자하는 바는 경이란 스스로 얻는 것이며 또한 이를 위해 자신을 극한 상황까지 몰아갈 수 있는 극기복례가 필요하다는 것임음 명확하다.이외도 남명의 정신세계는 당대 성리학적 전통과 많이 다르다.그의 유명한 사직소에는 이런 말이 있다. "불씨의 이른바 진정이란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위로 천리는 통달하는 측면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입니다" 당시로서는 과감한 견해이다.남명의 철학은 유,불,선의 삼교회통적인 성격을 갖는다.남명의 공부법은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적인 성격이 강하다.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남명은 <마음>을 얻는 것이 공부의 목표이다. "다섯 수레의 책들도 생각의 그릇됨을 없애기 위함" 일 뿐다.
남명의 철학이 실천형 자기만족에만 머물렀다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남명이 경과 함께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의'이다.의란 것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옯바름?추구하는 것이다.남명이 의를 추구한 것은 공자대의 원시 유학의 원론을 ?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남명은 비록 산속에 묻혀있었지만 끊임없이 세상과 관계하려 하였다.그는 제자들에게 유학경전이나 문학 공부만 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였다. "일의 상황을 모르는 성현은 없으며 변통할 줄 모르는 성현도 없으며,문을 닫고 혼자 앉아 있는 성현도 없다.율력,형법,천문,지리,군사,관직 등의 일도 모두 알아야 장애가 없게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남명에게 또한 가장 중요한 것중에 하나는 출처의 문제였다.즉 물러남과 머뭄의 철학이다.남명은 유학이 개인의 신분상승과 유지를 위한 학문으로 변해가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선비들이 공부를 통해 세상을 밝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만을 취한다면 옯바?공부가 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남명은 이말을 자신의 출처론의 기본으로 삼았다고 한다."나아가 벼슬하면 나라를 위해 크게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 은거해 있으면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한다.대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아 한다.나아가 벼슬해도 하는 일이없고 물러나 은거하면서도 지키는 것이 없다면 뜻하고 배운들 무엇하겠는가" 너무 쉬운 말처럼 들리지만 요즘 세태와 비교해 봐도 전혀 그릇됨이 없다.남명 본인은 과거의 뜻을 접은 젊은 시절 부터 세상과 관계하지만 스스로를 지키고 진리를 지키는 길을 택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남명 조식은 어린시절을 빼놓고는 경상 우도를 떠난 적이 없다.이 동네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김해의 신산서원,합천 뇌룡정,산청군 덕천서원,지리산 산천재 등등..... 아마 각 지역마다 살펴보면 비록 전국적인 지명도는 떨어졌을 지라도 그의 사상이나 학문 또는 업적이 출중했던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이 아웃사이더들에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역사를 읽는 즐거운 일이 아닐까 한다.
남명 조식...매력적인 분이다.
p.s)...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
4편의 글이 모여있다.어떤 글은 다른 논문에 실렸던 글을 그대로 옮겨놓은 인상이 강하다.자기의 글이 이 책 첫장임에도 "앞서 말한 4장에 자세히..." 뭐 이런 것이 들어있다.편집의 성의가 없었다는 비난을 받아도 싸다.또한 중복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물론 자꾸 반복해서 보는 효과가 있어 처음 읽는 사람으로서 그리 거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조금 더 다듬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마지막 장에는 남명이 남긴 시들이 그의 행적에 따라 진행되는데 한시를 좋아하는 분들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