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이 장맛비에 푹 잠겨있다.눅눅한 물기 사이로 흐물흐물 검은 손이 올라올 듯 하다.공포영화의 시절이 돌아왔다.무서운 영화는 보고 나면 자꾸 머릿속에 장면이 남아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다시는 안보마 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또 다른 여름이 오면 호기심에 또 영화표를 끊는다.그러고 보면 공포영화와 숙취는 상관관계가 있다.과음한 다음날 "다니는 내가 술을 먹나봐라" 라고 말하지만 며칠 못가서 그 불편한 속과 머리에 대한 기억은 알콜앞에 무너진다.공포영화도 그 찝찝한 기억을 곧잘 잊는다.

금요일 밤에 김혜수 주연의 <분홍신>을 보았다.영화포스터가 아주 인상적이다.화면처리를 통해 고딕분위기를 나타냈다.포스터 속의 김혜수는 공포에 넋을 잃은 밀랍인형처럼 앉아있다.그녀의 손은 분홍신을 신은 아이의 발목을 향해있다.

영화에서 분홍신은 여성의 욕망,에로스,질투의 상징이다.모든 초등학생의 학용품,신발,의상에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는 분홍색.... 분홍색의 촌스러움에 익숙해져 갈 수록 아이는 여자가 되어간다.하지만 먼 기억속에 자리잡은 분홍의 유혹을 여자들은 떨칠 수 있을까.

영화는 분홍신에 얽힌 저주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너무 진부한 서술구조이다.몇몇의 샘플이 죽고 주인공에게 저주의 덧이 씌인다.기묘한 일들이 발생한다.점차 저주에 대해 인식하는 주인공,그리고 주변에서 저주의 실마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남자,결국 저주는 과거의 원혼이 특정 물체에 투여한 원한..영화<링>에사 나왔던 그 전형적인 드라마구조가 이 영화에서 답습된다.

드라마 구조의 허술함을 보상하는 것은 우선 미장센이다.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지하철 공간은 친숙함과 폐쇄성으로 공포를 실재화 한다.이 영화의 지하철 공간은 실재의 공간임을 의심케한다.아무도 없는 지하철이다.또 지하쳘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마치 모두가 사라져 버린 도시같다.심리적 의존 자체 불가능한 공간은 형광등 불빛 처럼 음산하다.디지털 탈색작업을 통해 화면은 전반적으로 녹색톤을 띈다.녹색이 주는 이질감과 또 핸드핼드 카메라가 주는 불안감.

주인공이 세로 이사한 아파트 역시 아무도 살지 않는 건물같아 보인다.통로는 지하철처럼 푸른 형광빛을 띄며 어둠의 입을 열어놓고 있다.반대로 집안의 구조는  앤틱스타일이다.CF를 찍는 세트처럼 주인공이 모은 구두와 그녀의 화장대,침대등이 고딕형 공포를 떠오르게 한다.이 실내공간은 연출된 강한 콘트라스로 음산함을 이끈다. 간간히 거울로 비쳐진 분열된 자아 이미지,공포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내려오는 천장의 압박감,꿈을 통한 저주의 암시,공중부양,아이를 이용한 공포등등.. .... 공포를 자아내기 위한 연출은 그다지 새로울게 없다.하지만 알고도 늘상 사람들은 놀란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욕망이란 부분이다.주인공 김혜수는 중상류층 여의사이다.그녀는 대외적으로 우아함을 유지하는 허위의식의 상징이다.금욕적이고 지적이며 이성적이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보여주기 위한 이성의 노력일뿐이다.허위의식은 반드시 억압을 낳는다.(물론 세상에는 허위의식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도 많지만...) 내적으로 쌓인 억압은 분홍신을 통해 은밀하게 해소되기 시작한다.분홍신이 가진 욕망의 무장해제에 대한 유혹은 나이를 가리지 않으며 미추의 기준도 넘는다.김혜수는 자신의 아이와 분홍신을 두고 싸운다.놀러온 뚱뚱한 후배는 폭력을 행사하며 아이로부터 분홍신을 빼았아 온다.그녀는 분홍신을 신고 즐거운 기분에 휩싸인다.마치 젊음과 아름다움을 전부 소유한 사람처럼 행동한다.그 결말은 이미 알겠지만 말이다. 억압은 여자들에게 늘 함께 한다.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자가 분홍신이 된다.하지만 여기에는 질투와 음모가 덧칠된 저주의 영혼이 들어있으니 욕망은 곧 파멸로 이어진다. 공포영화가 가진 도덕주의적 메시지가 이 영화에서도 다시 한번 재탕된다. 남이 가진 것을 빼앗는 것.저주의 근본적 줄기가 되기도 하면서 현재에서 분홍신과 얽힌 저주의 패턴이 되기도 한다.

욕망을 자제하는 것 만이 저주로 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다. 영화에서 여자들이 과거나 현재나 미쳐버리게된 데는 남자들의 욕망이 존재했다.너무 쉽게 유혹에 넘어가고 한 여자를 파멸시키는 존재가 여자이다.물론 그들도 나름대로 인과응보를 당하지만 실재로 공포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모두 여자들 뿐이다.이렇게 직접적으로 금욕적이고 반페미니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포영화도 만나기 쉽진 않다.

저주를 풀었다고 공포가 끝나는것은 아니다.영화는 여기서 약간의 반전을 둔다.이미 공포는  억압안에 허위의식안에  죄의식안에 존재했었다는 것이다.영화초반 거울이미지로 분열된 정체서을 암시했다면 영화후반 지하철 씬에서는 주인공의 분열을 컷트 충돌이라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형상화한다.

아마 올해 이 영화가 올해본 첫 공포영화이자 마지막 공포영화가 될 듯하다.(공포영화는 역시 맘이 찝찝하다)  영화 전반부 억압과 공포가 어우러지는 긴장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고 진부한 스토리라인을 만들어낸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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