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서 보려다 놓쳤다.영화 <여자 정혜>. 며칠전에 퇴근후 집에 들어갔더니 와이프가 빌려놓았다.평일에는 비디오를 잘 보는 편이 아닌데 이 영화는 보고 싶었다.

아주 좋은 영화였다.감독이 독립영화출신이어서 그런지 신선함이 있었다.아이러니컬 하게도 영화의 내용은 지루하기 쉬운 일상의 모습이었지만. 영화는 온통 헨드핼드로 들고 찍었다.핸드핼드의 영상의 미덕을 보여준 가장 알려진 영화는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상륙작전 씬이다. 역동성과 사실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이 영화<여자 정혜>에서 쓰인 핸드핼드는 역동성하고는 거리가 멀다.영화 자체가 큰 이벤트없이 흘러가고 카메라가 쓸어담고 있는 것 역시 일상의 소소함이다.이 느슨한 일상의 모습을 그리는데 핸드핼드의 자연스러움이 한 몫을 해낸다. 그리고 정혜를 둘러싸고 있는 근원적 불안과 외로움의 시선을 핸드핼드의 흔들림이 그대로 잡아주고 있다.

특히 인상적인 컷들은 영화의 중요장면에서 잡은 정혜의 타이트한 얼굴모습이다.기계적이지 않으며 약간의 떨림이 느껴지는 카메라는 정혜의 감정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대표적으로 정혜가 고모부와 마주한 자리를 잡은 얼굴 샷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타이트한 얼굴모습을  롱테이크로 잡고 그냥 놔둔다. 화려한 화면의 변화가 없이 또 큰 음향효과 없이 배우의 미세한 심리변화와 롱테이크 하나로 갈등을 최대한 증폭시킨다.

이 영화속 등장인물은 아무도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주인공 정혜 역시 그 이름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정혜씨"라고..... 또한번의 타이트한 얼굴 롱테이크가 이어진다.이 장면 역시 아주 맘에 든다.김지수를 약간 우측으로 배치하고 얼굴 전면을 보여준다. 이 샷은 정혜가  어두움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웃는 듯 웃지 않는 배우의 표정이 잘 처리되었다.

정혜가 가진 외로움과 고독은 어린시절의 심리적 외상에 기인한다.그녀의 일상은 일상이 돼 무채색을 띤다.공간과 시간 모두가 아무런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 트라우마로 인한 자학도 아니고 그에 대한 반동의 퇴폐적 오버도 아니다.공기가 아무런 빛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물이 아무런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무념한 일상의 삶을 이어간다.물론 그 무념의 뒤안에는 상처로 인한 분노,아픔,고독이 숨어있다. 그녀가 타인 또는 세상과 맺는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그 벽은 결코 과격하지도 슬프지도 뒤숭숭하지도 않다.단지 절대적 단절의 힘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아무도 그녀를 호명하지 않으며 또 그녀 역시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이 관계성의 이름하에서 배경이 될 뿐이다.그녀는 고양이를 한마리 키우려한다.하지만 결국 자신이 그러한 관계성에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린다.고양이는 버려진다.

그녀는 결국 상처와의 대면을 시도한다.여린 여자 정혜의 힘이 처음으로 느껴진다. 분노의 극단적 분출까지도 염두에 둔다. 하지만.....   그래도 이미 그 과정을 통해 과거와의 단절이 이루어진다.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마치 흑백영화에 어느 한부분만 컬러로 채색되듯 그녀는 외로움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이에게 불려진다.김춘수의 <꽃>이란 시의 '호명행위'가 주는 위대한 의미가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형상화된다.

오랜만에 보는 좋은 한국 영화다.마이너 영화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