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별 뇌구조라는데 웃길려고 한 번 올려본다. 난 B형이다. 이런 유사과학을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헉...그런데 조금 맞다. ㅜㅜ 그런데 다른 혈액형들 둘러 보면 다 맞다.ㅋㅋ 그래서 이런게 사이비 과학이다. 하지만 '길에서 마주친 여학생'은 매우 맞는것 같다.호호호 Have you ever really loved woman?
영화<설국열차>에 대한 평가에 호불이 갈린다. 텍스트가 다양한 해석의 갈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 의미의 다층성으로 인해서도 즐거운 일이다. 예를 들어, 봉준호가 과거에 비해 디테일과 인과관계를 소홀히 했다는 비평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아마 헐리우드에서 제작했다면, 헐리우드의 제작자의 지시를 받아가며 제작했다면, 당의정에 쌓여서 먹기 좋은 알약을 만들었을 것이다. 매끄럽고, 소화시키기에는 훨씬 그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설국열차>는 봉준호가 작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만든 유기농(? ^^ )의 거친 SF영화다. 봉준호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해먹어 보겠냐는 듯, 밭에서 무를 쑤욱하고 뽑으며 씨-익하고 웃는 듯 하다. 제1 투자자인 CJ 역시 작품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은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CJ는 투자와 배급문제에는 -국내 흥행 성공은 사실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CJ가 가지고 있는 배급망을 생각하면 문제될 것도 없었다. 물론 비즈니스는 냉정하기 때문에 장사가 되는 작품이 필요조건으로 구비되어야 한다.
여러가지 평가와 논평이 가능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듣기 불편한 단어가 이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의 입에서 몇 차례에 걸쳐 들려온다. 그 단어는 '세뇌'다.
위대한 '세뇌'의 생존력은 반공의 시대가 끝나도 무의식 속에 기생하고 있다. '세뇌'라는 단어는 아마 '이데올로기'에 대한 한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할 것이다. 해방 정국부터 시작된 말일 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쉽게 말해, 좌익병, 빨갱이병이다. 즉 멀쩡해 보이던 삼촌이, 순종적이고 착한 딸이 어느 날 '세뇌'되어, 좌익활동을 한다. 7,80년대 영화나 드라마들은 이런 걸 강화한다. 80년대에는 '의식화교욕','좌경화교육'이라고, 뭔가 민주정의적인 표현법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 봐야, 오렌지나 어린지나 같은 말이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의리도, 주체성도 없이 '세뇌' 당한 것이다.
SF영화의 전통 속에서는 기계를 통한, 인간 개조 프로그램이 이루어진다.( 최근의 트렌드는 유전자조작이나 복제인간이다.) 클래식한 예를 들자면, <1984>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세뇌된 인간들은 '애비,에미도 없다.' 천륜을 끊을 만큼 세뇌는 무시 무시한 것이다. 각종 형태의 삐라가 만들어내는 상상은 그런 것이다. 빨갱이들이 어떤 사상을 주입하여-때로는 의자에 붙들어 앉혀, 고문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을 바꾼다는 것. 대단한 공포다. 나의 주체성이 사라진다는 것, 내가 피붙이 조차 외면할 만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내가 나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히 알 수 없는 이가 된다 것. 이것만큼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또 어디있겠는가? 한창 SF 재난영화에서 몸값 올리고 있는 좀비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애비 애미도 못알아 보고 물어 뜯는 좀비말이다.
영화<설국열차>를 본 사람들이 종종하는 세뇌의 구체적 시퀀스들이 있다. 학교에서의 윌포드를 찬양하는 장면, 하층계급 앞에서 '각자 자리를 지키라'는 오래된 격언같은 장면들이다. 사실 이것을 세뇌라고 읽어 주는 것만으도 이데올로기의 틈새를 보여준다. 물론 이것을 당신들의 일, 타자의 일, 영화 속의 일이라고 생각을 멈추는데 조금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 생각을 조금 더 발전 시켜 보면 이런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의 한국적 뒤틀림은 그렇다 치자. 그 '세뇌'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배제를 문제시 해야한다.
세뇌는 대단히 배타적 단어이다. 발화의 위치를 단 한번 만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한 쪽의 언덕에서서 외치는 고함인지 알 수 있다. 그 언덕에서 세상은 세뇌 당한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은 스스로를 '세뇌 당하지 않는자'의 언덕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 바닥도 비슷할 것이라는 조금은 객관적 생각까지 미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그것들을 이해하는 세뇌당하지 않은자다. 그들은 세뇌당한 것이고, 나는 세뇌를 관찰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세뇌를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뇌는 영화 속에서 만나는 팀버튼식의 알록달록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나 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자유주의적 가치관의 가장 근본적 결함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작동한다면,(작동한다. 인류 역사에 작동하지 않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앞으로도 작동한다.) 이렇게 자기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가장 이데올로기가 제대로,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는 지점이다. 그런 의미라면, 세상은 모두 세뇌당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아감벤은 푸코의 '장치'개념을 확대하여, '인류의 역사는 장치의 역사다.'라는 말을 한다. 그 장치라는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인간의 역사, 문화, 생활, 옷차림, 말하는 방식, 화장실에서 응가를 처리하는 방식 까지 구획하고 통치하는 기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맞다는게 내 생각이다. 내가 관심을 두는 인문,사회,미학은 이데올로기의 전체 지형도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일격을 먹이는 무엇이다. 그 지형도는 '세뇌'라는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결국 문제는 이데올로기 전체(전체는 형식,내용,효과 등등을 모두 포한하는 전체다.)대한 이해다. 그것은 세계를 아는 방식이고, 또 세계를 뚫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 세밀한 장치들의 효과들을 충분히 개진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를 건드릴 수 있는 상업 영화는 드물었고, 앞으로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