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이 걱정된다면 보지마세요. 길기까지 하니까. 제발. 그냥 영화관 가서 맘에 드는 제목 있으면 들어가서 아무런 인포메이션 없이 보고 오는 방식이 스포일의 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가장 지적인 방식이며, 또한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스포일 가이드 라인이기도 합니다.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순간 자기가 정말 행복한지 돌아보게 한다. 그럭저럭 나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혀끝을 살짝 건드릴 때쯤, '아니 그런데, 저 인간이 묻는 행복이란게 뭐지?' 라는 생각이 뇌신경을 건드린다.  이어서 '아니, 왜 저런 걸 묻는거야? 뭘 얻자고, 뭐 하자는 거지?'라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친다. 질문에 묘한 악취가 난다고 느껴지는 순간  몸속의 아드레날린은 별의별 거지 같은 위악의 제스처를 요구한다.

 

 영화<마지막 사중주>도 한가운데로 직구를 던진다.

 

 푸가 사중자단의 연장자이며 첼로연주자인 피터(크리스토퍼 월켄 역)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며 영화는 시작된다. 25년 이상 서로 이해하며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온 푸가 사중주단. 드디어 위기를 맞는다. 시작은 제2바이올린을 맡던 로버트(필립 세이 무어 호프만 역) 부터이다. 팀의 위기가 전면에 드러나는 상황에서  제1바이올린과 역할을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왜 자신은 늘 배경이 되어는 제2바이올린에 만족해야만 하냐는 것이다. 조화의 이름으로, 삶의 이름으로 덮어 두었던 크고 작은 욕망과 불만들이 하나씩 움을 틔운다. 과연 그들은  행복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대가로 치루었을까?

 

지젝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 주체가 자기 욕망의 불일치 안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행복의 대가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욕망하지 않는 것들을 욕망(하는 척)한다. 그래서 우리가 '공식적으로' 욕망하는 것을 얻는 일은 결국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된다. 그래서 행복은 본질적으로 위선적이다."

 

즉 푸가 사중주단의 명성과 행복은 지젝의 입을 빌자면, 모든 욕망의 배반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멤버 교체 또는 팀 해체의 위기 앞에서 유령처럼 돌아온다.

 

먼저, 영화 속 사중주단의 이름부터 살펴보자. '푸가 사중주단'. 영화 속에서는 뉴요커들이 '푸규어 쿼텟'이라고 발음한다. '쿼텟'이라는 발음이 매력적이다. 미끄러지는듯 하면서도, 살짝 당겨주는 그 느낌. '푸가'란 쉽게 말하자면, 여러 개의 성부가 주선율과 일정한 규칙적 관계를 두고 전체 화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합창단으로 예를 들자면, 소프라노가 주 멜로디를 한다면 알토와 테너,베이스등이 화음을 만드는데, 이 화음이 단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멜로디의 모방,변형, 또는 확산의 관계를 통해 전체적인 하나의 덩어리를 만든다. 영화 속 연주팀의 이름이 푸가인 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푸가라는 형식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원칙적으로 각 성부는 독립적인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멜로디를 연주하는 리더 악기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원론적 차원에서의 평등을 말하지만, 그 안에 순수한 의미의 평등은 존재하기 어렵다. 내재적으로 힘의 관계,권력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힘은 물론 상호적인 것이긴 하다. 푸가 사중주단 역시 그런 권력관계의 발현이 문제의 시작이된다. 

 

 

 영화<마지막사중주>를 이끌어가는 양날개는 중견의 연기파 배우들과 베토벤의 음악이다. 주요 배우들은 과르네리나 스트라디바리우스처럼 귀에 찰싹찰싹 달라붙는 연기를 한다.  그들의 연기에 실밥이 없다. 크리스토퍼 월켄,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케서린 키너, 마크 아이반니가 그들이다.  사중주의 생명은 악기 간의 완벽한 호흡과 밸런스듯이, 이 영화<마지막 사중주>에서 4명의 배우들은 최상의 연기 조합을 만들어 낸다. 화려한 제스처나 극단적 캐릭터는 없다. 그들의 연기는 잘 지은 흰색 쌀밥 같은 연기이다.윤기가 흐르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식감을 자극하는 밥 향기가 난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을 보자. 인물들은 현악사중주에 쓰이는 악기들의 보편적 특성과 동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딸이 엄마인 줄리엣에 대해 말할 때, '비올라는 두 개의 바이올린이 가지고 있지 못한 깊이를 더해준다.'라고 말한다. 실제 현악 사중주에서 비올라의 역할이 그렇고, 극중 비올라 주자 줄리엣의 성격이 그렇다.

 

 첼로 주자인 피터는 파킨스 병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 연주 생활도 곧 끝날 것이며, 자신의 삶 자체가 흔적으로만 남을 것이다. 지난해 먼저 떠난 아내의 그림자-피터의 상상 속에 등장하는 그녀는, 놀랍게도, 성악가 안나 소피 폰 오토였다-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피터는 첼로의 굵고 깊은 소리처럼 삶의 심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유영한다. 모든 시간에는 추억이 있고, 또 멈춤이 있고, 그리고 잊힘이 있다는 것을 그만이 안다.  제1바이올린의 대니얼은 음악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구도자적인 삶을 산다. 그는 러시아의 자작나무처럼 냉정함의 외피 속에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음악에 대한 헌심을 담았다. 그에게는 이민자의 정서적 고독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이 다가온다. 그의 흔들림은  중년의 객기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마지막 열정을 쉽사리 놓치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의 바람이 한순간 사라져버렸을 때, 그는 늘 하던 데로 활대를 다듬는다. 그의 숨결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회한과 그것 없이 살아가야하는 시간에 대한 고통이 묻어있다. 그의 반복되는 기계적 움직임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비올라의 줄리엣은 사중주단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고정점이다. 피터는 그녀의 스승이자 부모 같은 존재이다. 이제 그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제2 바이올린 로버트는 그녀의 남편이고, 제1 바이올린 대니얼은 한때 애인이었던 사람이다. 로버트는 그녀가 자신을 진정 사랑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원했던 것은 제2 바이올린의 역할처럼 안정감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젊은 시절 연인은 대니얼이었지만, 그 둘은 이제 동료일 뿐이다. 그녀는 로버트를 이해하려 하지만, 문제는 점점 그릇되어 나가고 이 둘은 별거에 들어간다. 또한 그녀의 딸 역시 다른 이름의 상처를 맛보게 한다.

 

로버트에겐 자신을 입증하려는, 즉 인정투쟁에 대한 욕구가 있다. 모두들 최고의 제2 바이올린이라고 칭찬하고, 본인 역시 '함께 하는 즐거움'을 더 높이 샀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욕구가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대로 멈추며 안주할 것인가, 파괴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할 것인가의 위치에서 로버트는 자기를 드러내는 방향을 택한다. 그가 보기에 팀은 지나치게 제1바이올린과 멘토인 첼로에 의존하고 있었다. 초기에 있었던 음악적 이견차이와 이를 좁히기 위한 열정적 소통마저도 희끗한 머릿결처럼 회색빛이 되어 버렸다. 그의 선택은 팀 내 균열을 만들어내지만, 사실 이런 '폭력'-하이데거가 존재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해했던-이 없었다면 그는 그의 욕망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현실적인 흡입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사건 앞에서 파국적으로 보이지만, 유연한 애도 과정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자의에서든, 욕망의 대면을 통해서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 임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그들이 이것들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온건하다. 고통스러우나, 파괴적이지 않고, 병적이지 않은 방식인 셈이다. 또한 단시간적이다. 그들은 뉴요커니까

 

 

 

영화 속 또 하나의 중심축은 첼리스트 피터의 고별 공연 레퍼토리인 '베토벤 현악사중주 14번 작품131'이다. 많은 베토벤 추종자들이 그의 최고 작품으로 후기 현악사중주를 꼽는다.  후기 현악사중주는12번부터 16,그리고 대푸가까지 포함하여 총 6곡의 작품이다. 흔히 베토벤의 일대기를 세시기로 나눌 때,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나온 작품들이다. 잘 알려진 베토벤의 교향곡 9번, 그리고 애호가들에게 일종의 그노시스적 영감을 준다는 후기 피아노소나타 같은 곡들과 함께 작곡되었다. 특히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는 매우 독창적인 면 때문에,그리고 일종의 현학성(?) 때문에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 음악은 과거 베토벤 음악과도 차이가 있으며, 이후 등장하는 후배 작곡가들 것과도 다르다. 이 영화에서 자주 들리는 현악사중주 14번의 1악장은 아다지오로 시작된다. 베토벤의 작품 중 아다지오로 시작되는 작품은 이것을 포함하여 오로지 2곡 뿐이다.

 

 1악장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푸가풍이다.  곡은 진행되면서 전형적인 푸가의 틀을 벗어나기 때문에 학자들은 푸가라고 지칭하 보다는 '푸가풍'이라고 말한다. 제1바이올린의 주선율에 이어 5도 차이로 다른 악기들이 등장한다. 푸가 사중주단의 마지막 곡이 '푸가풍'이란 점, 그리고 애도의 느낌을 자아내는 아다지오 악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에서 슈베르트가 임종을 이 음악이 지켰다는 말에 미루어 볼 때, 이 음악의 1악장은 그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도의 느낌을 자아내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극 초반부에 피터는 학생들이게 이 현악사중주의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모두 7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 쉴 수 없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악기 조율을 할 물리적 시간이 없다. 불협화음이 발생해도 그냥 가야 하는가? 아니면 멈추고 조율해야 하는가? 그렇다. 이 곡은 끊김이 없다. 마치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에 얹혀 흘러가는 우리네 삶처럼 말이다. 멈추어야 하는가? 아니 멈출 수 있는가? 아니 그냥 가야 하는가? 아니 그냥 갈 수 있을까?

 

 딜레마를 해결하는  한가지 방법으로,흔히 말하는 변증법적 화해에 반대하여 아도르노는  '말년성'이라고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말년성'의 특징을 조화와 해결이 아닌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정체성을 규정해내는 총체적 개념을 거부하고 부유하는 상태, 모순을 그대로 그 자체로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런 수행을 통해 모순은 파국과 생성의 가치를 배양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느껴진다. 앞서 말했던 피터의 딜레마와 아도르노가 말한 '말년성'의 특징은 결국 공명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가 담고 있는 의미의 일부이며, 영화 <마지막 사중주>는 이 생의 말년성을(이것을 연대기적으로 수용하면 절대 안된다.) 음악영화의 이름으로 영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모순의 스펙터클을 관객에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완벽한 봉합의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도 아니다. 사중주단의 조화를 파괴하지 않는- 즉 상징질서를 전복시키지는 않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는 마무리된다. 물론 '사중주단은 과거와 같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얼이 꼼꼼히 적혀 있는 악보를 덮는 장면이 그런 변화를 예시한다. 불안하고, 불확실하지만 자발성과 즉흥성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믿음으로 중단된 나머지 악장이 시작된다.  그들의 이들의 삶 속에서 타자에게 노출되어 버린 욕망의 흔적 역시 금세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해결의 기미를 희미한 낙관을 담아 영화는 보여준다.  즉 영화는 삶의 표면 아래 가라 앉은 타오르는 얼음의 그림자를 일정부분 추출해내지만, 개량적인 방식으로 재봉합 시키는 안정적인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쾌도난마다. 이것은 영화적으로 급속한 제동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이 현실적이긴 하다. 늘 봉합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마치 벌어진 살이 순간 오므라들 듯이 어긋남 속에서 급속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후기로 갈수록 꼼꼼한 연주 지시를 악보에 명기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베토벤의 연속적 연주 지시는 삶과 음악이 포개지는 자리에서 깨어져도 상관없지 않을까?  푸가사중주단의 멈춤은 그런 의미에서 엄격한 기준으로 보자면 어긋난 연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급작스러운 단절이 없다면, 우리 삶에는 어떤 도약의 가능성들이 남아 있을지 반문해보게 된다. 새로운 멤버와 함께 연주는 재개되고, 관객들은 그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은 여전히 살아 있고, 삶도 여전히 지속된다.

 

 

 

 

 

 

 

 

 

 

 

 

 

 

 

 

 

 

 

 

 

 

상단 왼쪽부터 부다페스트사중주단, 과르네리사중주단, 이탈리아사중주단

하단 왼쪽부터 에머슨사중주단, 타카시사중주단, 브렌타노사중주단.

p.s) 

 

1.영화사 보도자료를 보니 감독이 어려서부터 실내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속 푸가 사중주단을 만들어내면서 과르네리 사중주단, 이탈리아 사중주단, 에머슨 사중주단을 모델로 생각했다고 한다. 과르네리는 40년 이상 유지된 사중주단이었다. 1,2 바이올린의 구분이 당대 다른 사중주단에 비해 좀 약했다. 이탈리아 사중주단은 여성멤버가 있었다. 에머슨은 1,2바이올린이 곡에 따라 서로 임무를 바꾸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 팀이 모두 베토벤 후기 사중주 음반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추가하자면 타카시 사중주단과 알반베르크사중주단. 그리고 오래되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부다페스트사중주단과 부슈사중주단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훌륭하다.

 

2.영화 속에서 피터의 후임으로 오는 나니 리는 실제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첼리스트이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음원이 나니 리가 속해 있는 브렌타노 사중주단의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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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5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3-08-06 06:43   좋아요 0 | URL
^^ 오타지적을 원하지 않는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다 할려면 ...ㅎㅎ 그렇네요. 젠킨스는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