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의 지형학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6
문강형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누가 세계의 파국을 말하는가?  파국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로지 대중문화의 이미지 속에서만 존재한다. 극장은 파국을 스릴로 즐기는 '재미의 성전'이 될 뿐이다. '고도'는 극이 끝나도 무대 뒤에서 발만 비비꼬고 있을 뿐이며 '유토피아'는 '달의 어두운 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달은 언제나 달아나는 달, 잡히지 않는 달이다.

 

 현실 세계에서 파국은 부분적 공모자들이 돌리는 술 잔 속에 자기 연민과 함께 순회한다. 지긋 지긋한 세상이 확 한 번 엎어지길 바라는 소시민의 소회를 담아 숯불 위에서 몸을 재빨리도 뒤집는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욕망은 입냄새를 풍기며 거부할 수 없는 눈짓을 보낸다. 그 매력적 눈웃음을 거절할 수 있는자는 누구인가?  적은 아름답고, 향기롭고, 교양 있으며, 세련되었다. 차라리 적이 뱀의 머리를 달고 있는 메두사이거나, 외눈박이 퀴클립스 였다면. 우리 대다수는 그 욕망의 수액을 받으며, 눈치를 받으며, 애교를 섞으며,사랑을 염원하며, 원만한 관계를 희망하며 하루를 산다. 어느덧  옷깃 목덜미깨 누런 때는 옥시크린과 유한락스를 환상비율로 섞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허리 띠를 졸라맨 배에서 누린내가 난다.

 

번개 구름은 급속히 멀어져 간다.

남겨진 것은 무겁고 축축한 8월의 더위다.

..

온 마을에 소독약 냄새가 감돌고 있다.

                                                   마루야마 겐지,<달에 울다>(p.33)

 

 인류는 오랜 시간 전부터 디스토피아를 상상했다. 성경에 의하면 파국은 아담과 이브가 유토피아를 잃어버린 순간 부터 존재했다. 잃어버린 에덴의 반대편에는 징벌로서의 영원한 노동과 탄생 그리고 죽음이 연결되는 반-유토피아로서의 현재가 있다. 기독교의 진보 서사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파국을 통해, 천년왕국이라는 유토피아로 돌아간다.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땅 위에서 춤을 추는 인간을 칭송하기 전까지 이 땅은 여전히 버려진, 부끄러운 대지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피를 먹고 자라나는 역사라는 나무들이 있었다.

 

 이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들,  역사의 나무 앞에 파국이라는 글자로 제의를 치르고 허공으로 불사르 자들은 누구인가?  감옥에 쳐넣고, 재산을 빼앗고, 몽둥이 찜질을 가하고, 때로는 이름 없는 산 속에 묻어도 괜찮았던, 그들이다. 하층계급, 민중, 서발턴 그들이다. 세상의 족쇄가 깨지기를 원하는 파국의 상상은 늘 그 언제나 '너머'를 바란다. 그리하여 파국의 정치성은 유토피아적 급진성과  신발 코를 맞대고 있다. 중세의 뮌처의 '천년왕국 운동' 부터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정치철학들까지 이런 지도 위에 있다고 <파국의 지형학>은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파국의 역사학이 아니다. 지형학은 과거와 현재를 현 공간 위에서 파악한다. 우리의 역사는 그런 지층의 무늬 위에 있는 것이며, 동시대는 비동시대적 요소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문제는  즉 파국의 상상을 현시대에 재복원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하여 포스트 -정치 시대의 무기력증 극복하고 새로운 유토피아의 맹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의 담론적 단초를 기획해 보는 것이다. 즉 현재의 급박성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파국의 지형학>은 이를 위해 두더쥐 처럼 땅을 헤집는다. 굴착 작업에는 역사적 사실들, 영화, 문학 등이 보조적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저자가 먼저 대결해야하는 현실의 무늬를 살펴보자. 읽지 않아도 알아 버린 것 같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하나의 담론적 분기점으로 등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는 헤겔의 절대정신의 완성을 공산주의와 장벽의 무너짐 속에서 본 것이다. 판결은 끝났다. 탕탕탕... 앞으로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유토피아' 만이 있다.  즉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합의 최종적 성공으로 '자본의 전체주의화'가 이루어지는 단계. <파국의 지형학>이 처음 대결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자본주의의 유토피아'라고 말해지는 가짜 유토피아. 또는 세계의 일부를 위한 유토피아.  저자는 보드리야르를 인용하여 이런 사회를 오히려 '완벽하게 해방되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노예화된 사회'를 말한다. 이 '적 그리스도적 유토피아'는 궁극적으로 자기-노예사회의 등장을 예견한다. 이 지점은 푸코의 규율권력이 통치권력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지는 주체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자기를 자발적으로 매니지먼트하는 호모 이코노미코스의 통치전략 말이다.  <파국의 지형학>이 지적하고 있는 또 다른 대결점은 포스트 모던 담론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던의 초월적 속성이 '방대한 스케일 만큼이나 비현실적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실재하는 억압에 대한 싸움이 아닌 것들을 통해 무기력증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 시대의  주체는 결국 '그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라는 냉소적 주체인 셈이다. <파국의 지형학> 속에서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냉소적 주체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만나게 된다.

 

 이제는 그 어떤 역사의 전망도 발견하지 못하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체제 안의 ' 스릴들(선거,소비,대중문화,폭력'이 주는 쾌락을 그저 즐기면서 자신과 가족의 안녕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최후의 인간'이 가진 가치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회의와 냉소 그리고 무기력이다.  (문강형준,<파국의 지형학>,P132)

 

 결국 저자는 현재의 불능적인 지층을 뚫고 인류의 시간층 속에 늘 잠재해 있는 유토피아의 기획을 다시 꺼내려고 한다. 그렇다면 시대의 궤를 달리하면서도 이어져온 유토피아의 공시적 특징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플라톤, 아우구스투스, 모어의 예를 들어 그 중심에는 '공통의 것이 낳는 선'에 대한 동경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통의 것은 시민사회의 담론적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자원의 분배 문제를 주요한 과제로 하는 정치경제적 내용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공허할 것이다. 탈이념화 시대라는 곳이 정작 탈각시키고 있는 것은 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숙의민주주의적 개념으로서의 '공동선' 같은 것들은 비-정치경제적 요소를 조건으로 하는 것인 양 보일 때가 많다. 파국과 유토피아로 이어지는 상상을 거부하는 이들은 단지 예수를 핍박한 빌라도만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우리는 또한 수많은 바리새인들과도 대결해야만 한다.  합의제적 민주주의의 장치들은 이런 상상을 불허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파국을 현실화의 이름으로 제어하고 예비함으로써 체제의 연착륙을 위한 대표적인 장치일 수 있다는 점은 늘 예의주시해야 한다.  저자는 '정치적 종교'의 위험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존 그레이의 현실주의를 예로 들어 이를 비판하고 있다. 전체주의화를 지적하다가 정치 자체가 갖는 '근본적인 미래에 대한 믿음'같은 것까지 종교의 유사형태로 비판한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목욕물을 버리다가 대야물 속에 아이까지 버린다는 것이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저자가 유토피아 정치를 위한 조건들이 궁금해진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긋난 시간' 이다. 일종의 시대와의 불협화음. 일종의'열정'과 '과잉' 그리고 '결단' 같은 '비합리적 요소'들이다. 조르주 아감벤이 니체-푸코를 경유하여 말하는 시대에 들러붙으면서도,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볼 줄 아는 그런 '동시대성'을 의미한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니체적 세계관이다. 기독교의 노예적 상태를 혁파 하기 위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신의 죽음'은 '초인'을 예비한다. 합리성과 도구적 이성의 결합으로 평평하게 된 세계. 자본주의의 최종적 유토피아를 잠재적 현실태로 인정한다면 결국 바위 같은 현실의 층위를 뚫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힘, 이교도의 힘일 수 있다. 주체는 계몽주의 시대 이래 역사의 병원에서 오랜 기간 중성화 수술을 받아온 셈이다. 열정, 반-합리성, 반-이성은  체제가 삭제 시키려고 했으나 늘 실패하고만 '야수성이다. 체제는 이것이 세계를 교란시키고, 구멍을 내고, 폭발시킬수 있다는 것을 안다.  결국 파국의 상상을 통해 저자는 '야수'를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반-이성,반-합리를 토스카노의 '광신'이 가진 열정의 급진성을 통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사회 변혁의 근본적 요청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모습들을 만날 수 있고, 주어진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있다. 저자는 현실의 모순이 있다면 유토피아적 열정도 사라질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프레드릭 제임스의 말이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그것을 상상할 수 없을 때에도 가장 진정한 것이다. ... 유토피아의 기능은 오히려 우리가 어쨋든 갇히고 묶여 있는 시스템의 이데올로기적 폐쇄를 드러내기 위해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전적으로 무력함을 천명하는 데 있다. 만일 우리가 역사 또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다면 비유토피아적 현재에 감금되고 말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스,<유토피아의 정치학>, 뉴레프트리뷰2 ,p367)

 

 흔히들 유토피아주의를 뜬구름잡는 이상주의라고 치부한다. 실제 유토피아적 염원이 발전 시킨 부분은 빌려온 500원 짜리 정도 취급받는다.  유토피아주의는 이중감금의 해체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첫번째는 유토피아가 가진 더 나은 세상으로의 진보, 그를 위한 세계와의 투쟁. 두번째는 우리가 이성과 합리성 또는 이것을 장치로 사용하는 시스템에 갖혀 있다는 각성을, 충격을 요청함으로써 내부적 폐색에 갖혀있는 주체를 분쇄하는 것이다.

 

 

  이제 마무리로 들어가자. <파국의 지형학>은 정치 비평이자 텍스트 비평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포스트모던 정치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보편성을 강조한 지젝이나 바디우의 주장과  맥락 속에서 씌여졌다.  지젝도 자주 인용하는 SF문학, 디스토피아 소설 등이 보론의 장에서 텍스트로 등장한다. 결국 모든 파국은 텍스트 속에서의 파국으로, 앞서 말한 대중문화 속으로의 파국이다. 이 책의 구성이 그런 혐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역사가 말소된 상태에서는 텍스트 속의 혁명에 대한 상상 만이 유일하게 시스템이 허락해 준 것일 수도 있다. 수잔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공포영화의 스펙터클화가 공포를 훈련시키 부드럽게 해준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물론 저자가 전제 했듯이 상상력 마저 소거된 소비 자본주의 속에서 상상력의 부활을 도모하는 것은 1차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꿈조차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는 '꿈'을 꾸는 것은 대단히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치킨런> 속의 주인공을 여전히 기억한다.)이 책<파국의 지형학>이 가르키고 있는 곳은 엄밀하게 그곳까지이고, 그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늘 멀어지는 달에 대한 고민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파국의 지형학>이 궁극적으로 염원하는 실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정치는 일종의 안타까운 징후이다. 무기력한 세상, 즉 우리는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곳까지 후퇴한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 마저 잃지 않기 위해, 그곳만 지키면 그래도 도약의 발판은 만들어진다는 소망까지 밀린 것이다. 결국 <진격의 거인>들이 월마리아, 월로제를 지나 마지막 월시나까지 온것일까? 

 

 우리는 다시 지식인의 과제, 확대된 독자의 과제로까지 질문을 옮겨와야 한다. 새로운 윤리적 정초를 구성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아주 오래 전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던 '유기적 지식인'은 이제 논어나 맹자에 나오는 지루하게 옳은 소리정도로 들리는 것 같다. 이런 폐색 상황을 지식인은 어떤 실천 전략으로 헤쳐 나아갈 것인가? 상상력의 정치가 불러 일으키는 가능성 영역이 어떻게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낼 지, 그리고 설득력을 갖추어야 할 지 많은 실천적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라는 도매업자나 취하는 방식은 분리와 안주의 콘트리트벽에 모르타르를 바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가 니체를 인용했듯이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한 인간의 혼돈' 에의 동참을 위한 떨림의 방식들이 동시에 고민되어져야만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다. 그 떨림의 방식에 대한 책임까지도 이 시대의 지식인은 안아야만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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