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블로그에 소개한 적이 있다. 이자람의 <억척가>다.  몇 달 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공연이 있었다. 매일 대형 포스터 앞을 지나면서 '봐야 하는데' 만 되뇌였다. 그러다 결국 회사 일과 공연일이 겹쳐서 만남을 놓쳐 버렸다. 다행히 새 봄  2회 부산 앙콜 공연이 있었다. 따뜻했던 지난 주말 토요일(3/17) 공연을 봤다. 객석은 만석에 가까왔다.

 

 

 

 예매를 해놓고 의구심이 하나 생겼다. 무대의 배치 문제다. 전통적으로 판소리는 객석과 같은 눈높이이거나 객석 보다 낮은 곳에서 연행한다. 판소리의 연행 장소는 잔치집이거나 양반집이었다. 또는 장터인 것이 일반적이다. 마당에서 공연을 할 경우 양반들은 마루 위에서 본다.  한옥 구조를 염두해둔다면 판소리 연행의 공간배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은 전통적인 서구식 무대다. 무대가 객석보다 성인 남자의 가슴 높이 만큼 높다. 일단 <억척가>가 창작 퓨전 판소리라고 하더라도 이런 공간 배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주변에서 무대 위에 객석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일정 정도의 의문은 풀렸다. 일반적인 다른 공연장에서도 그 방식 밖에 없을 것이다. 객석의 가장 깊은 쪽에 관객이 둥그렇게 앉는다. 그리고 공연자는 무대 안쪽을 보고 공연한다. 쉽게 도상화하자면,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를 생각하면 된다. <억척가>에서는 오케스트라 쪽이 객석이 되고 연행자는 지휘자의 위치와 시선으로 선다. 그리고 전통적 의미의 객석은 <억척가>에서 막으로 가려진다. 이 공간 배치는 나중에 한 번 더 언급할 예정이다. 효과적인 이미지장치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억척가>는 창작 판소리이다.브레히트 <억척어멈과 자식들>을 주요 창본으로 한다.요즘 세대에겐 낯설지도 모르겠으나 8,90년대 학번들에게 브레히트는 친숙하다. 대학 동아리의 주요 레퍼토리이기도 했으며, 예술적 이념화(?) 교제로도 자주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관심사는 내러티브라기 보다는 작품의 형식이었다.

 

 극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의 배경인 30년 전쟁을 우리에게 친숙한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로 옮겨 놓는다. 짧은 단가에서 이자람은 <적벽가>의 첫번째 아니리를 맛보기로 선보이며, 이 공연이 기존의 판소리와 다른 우리말투의 공연이 될 것임을 말한다. 그러니 안심하라고 말이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판소리<적벽가>의 숨겨진 주제가 '반전'에 있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와 <적벽가>는 은밀히 공명한다. 판소리 <적벽가>의 '죽고타령'같은 것이 실제 이자람의 <억척가>에서도 짧게나마 들린다.  

 

공연에서 이자람은 1인 15역을 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판소리 창자는 기본적으로 1인 다역을 한다. 춘향이 되었다가 몽룡이 되었다가 월매가 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즈음 판소리에도 역할 분화가 일어난다. 관객의 변화와 서구극의 영향이었다. 이 때 생긴 것이 몇 몇 역할을 분담하는 창극이다. 1936년 정정렬의 주도로 이루어진 빅터판 <춘향가>녹음은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는 판소리 창극계열의 녹음이다. 이 녹음이 전설로 남은 것은 한 세대를 풍미했던 명창들이 모두 출연하기 때문이다. 정정렬, 임방울,이화중선,김소희, 박녹주 명창이 그들이다. 중요한 차이가 있긴 하다. 이자람은 단순히 노래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창극의 경우에도 역할 분담이 있어서 연기를 하며 창을 한다. 하지만 이자람은 창과 연기 모두를 혼자서 해낸다. 이런 경우는 매우드물다고 할 수 있다. 잡종어를 만들자면 '모노 뮤지컬드라마'라고나 할까. 

<억척가>에서 이자람의 연기 중 눈에 띄는 부분은 해학적인 보조 캐릭터들의 특징을 잘 살려내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극을 연상시키는 장군, 순정마초같은 주방장, 지식인의 상징인 거사, 백마담 등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연기하며 또 캐릭터 간의 연결을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한다. 광대로서 관객들을 휘어잡는 힘은 이지람의 뛰어난 캐릭터 표현력에서 출발한다. 신재효가 광대의 기준으로 득음보다 아니리를 먼저 언급한 것도 관객에 대한 흡입력 문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흥미있는 캐릭터 구성이었지만 한 숟가락의 아쉬움도 있다. 그것은 주인공  억척네의 캐릭터의 연기였다. 억척네가 가진 삶의 질곡의 깊이를 이자람이 담아 내었는가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간다. 이자람은 혼신의 연기를 선보이지만 몇 몇의 연극적 장치와 처절한 구음으로 이것이 표현되었다고 보기에는 심도가 얕다. 비단 이자람의 나이 문제때문은 아니다. 억척네의 성격 분석에 있어서,은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주름살을 표현해 내는 연기적 디테일을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초선의 죽음 이후 억척네의 각성 또는 인물의 성격변화는 너무도 급작스럽고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다. 먼저 첫째 아들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암시한 것은 초선의 죽음이라는 클라이막스를 처리하기 위한 이완으로 대단히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초선의 죽음 이후 억척네의 허망함과 한을 조금 더 길게 처리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초선의 죽음과 급작스러운 마감그리고 이어지는 '인간다운 삶을 살자'라는 계몽적 메시지는 각성을 위해 달려온 듯한 인상을 준다.즉 판소리<억척가>의 결말은 억척네의 이후 생의 열린구조 보다는 '인간다움'의 계몽의 강박으로 서둘러 정리된다. 이것 역시 판소리가 가진 전형성을 재영토화해내지 못한 연출이 아니었나 싶다.

 

 

 

판소리<억척가>는 기본적으로 고전적 의미의 비극적 플룻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비극의 좋은 플롯의 예는 이렇다.

 

'덕과 정의에 있어 탁월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78쪽)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명망가들을 대상으로 생각하였지만, 현대에와서 이것을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관객은 억척네와 쉽게 동화된다. 공연 중간에 낮은 흐느낌이 객석으로 부터 자주 포착된다. 억척네에 대한 연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책에서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 되며,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 된다.' 라고 말한다.  관객에게 자녀 모두를 잃는 억척네의 불행이 그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기본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극과 배치되는 소격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판소리는 지속적으로 해설자가 개입하여 브레히트가 단절을 위한 서사극의 장치로 이용한 것과 유사한 형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판소리 창자는 브레히트적 단절보다는 극적 인물이나 사건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또한  미학적으로 음악이 가진 효과를 간과할 수 없다. 음악은  여타의 장르에 비해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경향이 강하다.  판소리는 유사한 형식적 분절에도 불구하고 소격보다는 동화라는 몰입의 길을 관객에게 요청한다. 현대의 관객 역시 브레히트의 소격장치라는 것을 하나의 극외적 장치로 이해하고 다시금 몰입의 중력에 빠져든다. <억척가>는 그런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내러티브를 빌어온 것이지 브레히트의 서사극 양식을 빌어온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던 무대 장치 부분을 이야기해야겠다. 극에서 무대의 뒷막은- 전통적 극장에서 객석의 공간-두 번 정도 노출된다. 비극적 죽음과 연관된 부분에서다. 특히 인상적인 사용은 초선의 마지막 북장면 이후의 이미지 효과이다. 초선이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마지막 북을 두드리는 순간, 극장의 막이 숨이 떨어지는 것처럼 일시에, 망설임도 없이, 훅하고 떨어진다. 심도 깊은 빈 공간에 달린 광목천이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있는 다리처럼 진양조로 하강한다. 하얀 천을 띠처럼 두른 무대 뒤편은 녹색계열의 조명이,무대 위에 절규하는 억척네는 붉은 계열의 조명이 비춰진다. 객석 의자를 넘어가며 덮여있는 하얀 천들. 규칙적인 줄과 통로. 의장대가 사열 하듯, 국립묘지의 묘비들이 정렬하듯.  죽음의 영상 이미지가 구축된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대규모의 학살, 이름없는 주검이다. 4.3 항쟁이나 5.18 항쟁 ,또는 수많은 전쟁 사진에서 등장하는 길게,그리고 일정하게 놓인 빈 관들.  이자람의 웃음과 울음이 섞인 구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구음이 가진 의미를 길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최소한 인간계에 있으며 비인간계를 재현하는 소리라는 것 정도로만 설명해도 족할 것이다. 이 장면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영상과 음악을 통해 대단히 잘 표현해내 장면이다.  

 

판소리는 관객과 소통하는 극이다. <억척가> 역시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관객은 웃고 울고 박수친다. 무대 위의 악사들은 때론 멜로디 라인이 빠진 반복적 리듬의 언캐니(uncanny)함으로 비극적 정서를 극대화한다. 어떨 때는 관객의 박수를 유도하며 뽕끼 어린 음악을 연주한다. 북치는 고수가 되어 추임새도 넣는다. '아마도 이자람 밴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악사들이기에  북보다는 기타나 드럼, 퍼쿠션이 더 자유로운 듯 하다. 북소리에는 달라 붙는 감칠 맛이 떨어지지만 힘과 직선적 패기와 흥이 들어있다. 막걸리를 주고 받으며 이자람과 악사들과 어울리다 보면 지루할 겨를은 없다. 그러니 '재미'만이 예술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후회할 일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공연 말미에 이자람은  브라질 공연을 간다고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외면 받는 장르인 판소리를 새롭게 재창작하여 열심히 뛰고 있는 청년 이자람에게 수박덩어리만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녀는  훌륭한 광대가 될 것이다. 만약 새로움이라는 이름의 레테르를 찾아다니는 매스 미디어가 '오래된 미래'가 되어버린 판소리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 중심에 이자람의 <억척가>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한편으로는 매스 미디어의 분칠한 관심이 살짝 피해가 주길 바라는 마음도 한 구석에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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