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싸우는 상대는 알기 쉽지. 하지만 네가 왜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나오는 말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저 대사가 쓰인 장면이 주인공의 사형 집행 전날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의 내러티브 자체가 혁명의 역사,또는 정치의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요소들을 압축해 놓았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이야기를 맥락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여기저기 들여다보면, 이 둘 다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것이 미력한 내겐 오히려 불편하다. 특히 두 번째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쉬운 일이된다. 그것을 어렵게 하는 것은 외부적 억압때문이지 진실 자체 때문은 아니다. 억압이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 진실이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 시대에 누군가 진실에 대해 말한다면 그에게 씌여질 처방전은 '히스테리'이거나 '분열증'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진실을 말하는 데 그는 진실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 중 최악은 넘기는 책장에 따라 주체를 주채하지 못하는 일부 독자들이다. 혁명가의 책을 읽는 순간 검은 깃발 아래 설 듯 말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붉은 깃발이 그의 머리 위에 있다. 다른 종이뭉치를 끝내고 나면 그는 녹색 휘장을 두르고 휘파람을 불고 서있다. 말을 바꾸어 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로지 문자적 감응을 즉각 즉각 배설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이 시간의 발효 속에 제대로된 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습관적 위장 장애로 인한 설사에 지나지 않을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거기에 열광한다. 장인지 똥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곳에 오로지 포토샵을 하지 않아도 날것으로 어여쁜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름다운 말들로,또는 가정된 진실로 그 말들이 '진실로'-여기서 '진실로'라는 말은 본인도 결코 의식하지 못하는 순수한,또는 순진한이라는 차원이다.-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 평등, 우정, 사랑, 정의, 관용, 조화..... 이 모든 말들은 입에 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어찌 이 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가치가 마뜩치 않다고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만,
영화<대부>에 돈 꼴레오네의 말은 참고 삼을 수 있을 듯 하다.
"모임을 주선하겠다고 내게 오는 놈, 그 놈이 배신자다." (로저 에버트 <위대한 영화>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