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개인주의 신화
이언 와트 지음, 이시연.강유나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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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4대천왕' 이라는 말이 있다. 그 시작은 8-90년대 홍콩,대만 영화의 젊은 배우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여명,장학우,유덕화,곽부성'이 그들이다. 이 말은 불교에서 동서남북을 관장한다는 사천왕상에서 그 모델명을 따온 것이다. 지금은 이 단어는 '한류4대천왕'이니 '얼짱 4대천왕'이니 해서 반복된다. 팬들 사이의 갈등은 대개 네번째 인물의 선택여부를 두고 발생한다. 즉 대개가 3번째까지는 비슷한 공감들이 형성한다. 문제는 늘 마지막 탑승자다. 궁금하다 싶으면, 걸그룹 4대천왕을 주위 사람들과 한번 논의해보시라.  

 

이안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에도 4대 천왕이 나온다. 그의 분석에 설득력을 부여할 문학사의 살아있는 유명 캐릭터들이다. 그 역시 네번째 인물의 선정 과정에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통상적으로 많이 뽑히지만 이안 와트에게서 보딩패스를 받지 못한 인물은 고뇌하는 인간 '햄릿'이다. 그가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상 기피인물)이 된 이유는 햄릿이 지식인층에 유독 사랑을 받는 매니아적 인물이라는 것때문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이 책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므로 이 정도에서 지나가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이제 저자가 선정한 4대 천왕들을 살펴보자. 면면은 이렇다. 악마와 거래하는 파우스트, 늙은 기사 돈키호테, 바람둥이 돈 후안, 무인도 표류자 로빈슨 크루소. (아무래도 '돈 후안'은 도덕적 이유때문에 도서 선정위원들의 기피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 덕분에 우리는 돈 후안에 대해 잘 모른다. 개인적으로도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조반니>와 조니뎁과 말론브랜도가 나온 영화<돈 주앙>밖에 보지 않았다.)저자는 이들이야 말로 '근대문학을 통과하며 개인주의를 반영하고 신화가 된 네 명의 남자들'이라고 단언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꽤재재함이나 돈키호테의 앙상함이 이미지적으로는 아이돌 4대천황의 위용만은 못하다. 그러나 이 옹색해보이는 늙은 인물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아이돌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고 빛을 발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총 3장(르네상스와 반종교개혁기/낭만주의/20세기)으로 구성된다. 각 장의 마지막에 구체적 작품 분석을 넘어서 시대적 흐름과 몇 가지 개념형들에 대한 이해, 전체적 윤곽을 파악하는데 긴요한 평론이 실려있다. 이언 와트는 서문에서 이 책이 통사적인 연구임을 밝힌다. 4명의 인물은 최소한 그 시대의 어떤 흐름들을 반영하고 또 동시에 변형되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영론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고 정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시대적 속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또 그것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영론이든 초월론이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큼 비평의 진폭을 크게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안 와트는 이 4명의 인물의 성격과 위치들이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모되어 가는지를 따라가고 있다. 그것을 통해 애초 이 인물의 탄생의 기원과는 매우 다른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인물들에게 변화를 가한 사회적 영향력들을 고려하게끔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인물들은 -시기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반종교개혁기라 불리는 반동적 시기에 태어났다.

 

파우스트,돈키호테,돈 후안은 모두 르네상스의 적극적이고 개인주의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고자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종교개혁 세력과 갈등하게 된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P.15)

 

이 인물들이 사회와 '갈등'한다는 점이 촛점이다. 이안 와트는-왠지 이름부터 영국 탐정 샬록 홈즈의 향기를 뿌리지 않는가?- '갈등'의 양상 속에서 네 인물들이 반동적 종교개혁기를 뚫고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문학 속의 신화가 되어가는지를  그 흔적을 추적해 나간다. 대표적으로 괴테의 <파우스트>로 정착된 '파우스트박사'이야기를 보자. 파우스트 이야기는 16세기 전반부 흑마술사 게오르크 파우스트라는 인물로 부터 시작된다. 마술에 적대적이었던 당대의 인문학자들의 글을 통해 그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는 스스로 '파우스트의 후계자' '제2의 마구스'라고 칭하고 다녔다. 실제 마술사로서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남색가라는 둥 유아 성애자라는 둥 사기꾼이라는 둥 세간의 혹평도 안고 있었다. 이안 와트는 당대 인문학자들이 점성술사나 영지주의적 마술사의 후계자라고 지칭하는 자를 언급하고 공격한 것에 실마리를 얻는다. 

 

학자들은 실존 인물로서의 게오르크 파우스트가 말로와 괴테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델로  

얼마나 부적절한지 밝히는데 집중해왔기 때문에,실존 인물 파우스트가 어떻게 해서-나름 졸렬한 방식으로 나마-신화를 생겨나게 한 주요 세력들에게 매혹적인 상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못했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P.32)

 

이후 파우스트를 악마와 연관하여 부활시키는데는 루터파가 큰 역할을 한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신의 세계 속에 부정의 대상으로 악마성의 존재를 인정했다. 인문학자들이 이성의 힘에 의해 마술적 권능을 부정한데 비해 루터파와 기독교는 그런 '힘'이 있으며 그것이 이원론적 세계 속에서 악은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구상화해낸다. 이안 와트가 떠돌이 실존인물인 게오르크 파우스크가 신화 속의 전설족 존재로 만든 가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후 1587년에 괴테의 <파우스트>의 원전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파우스트 서>가 독일에서 출간된다. 몇 가지 원형들이 이 때 만들어지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성격부여, 욕망의 부정,기독교적 징벌메커니즘, 계약과 이행에 대한 강조 등이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16세기 기독교의 확산과 개인주의의 도래하에 '교훈주의'가 강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영국의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박사의 생과사의 비극적 역사>가 등장한다. 이안 와트에 따르면, 크리스토퍼 말로가 당대 대단히 파격적인, 파우스트적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가 파악하는 말로의 파우스트 신화 요체는 세가지로 요약된다. '개인의 직업선택, 대학 지성의 소외, 영혼의 영원한 파멸'이 그것이다. 흔히 파우스트를 '지식인 신화'의 대표적인 양상으로 꼽는 것이 말로의 공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이 '영혼의 영원한 파멸'이다. 이것을 이안와트는 종교적 분위기 하에서 개인주의가 반응한 위악적 선택의 결과로 바라본다. 즉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열망을 이어받았으나 실현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복수와도 같은 것이다.

 

'아,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이 진실이라면 내 영혼은 나를 떠나고 나는 야만의 짐승으로 바뀌련만. 모든 짐승들은 행복하도다. 죽으면 그 영혼은 곧 스러지나니' <파우스트박사의 생과사의 비극적 역사 5막 2장>

 

이안 와트는 반종교개혁기의 통제된 개인주의의 욕망이 신이 주었다고 하는 불멸의 영혼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형식으로 일종의 복수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클리언스 브룩의 결론을 재인용하며, 파우스트가 자신의 개인성을 유지한 것이 '그의 영광이자 파멸' 이라고 말한다.

 

청교도 윤리에 질식당한 주인공들은 부르주아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며 개인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신화화된 인물로 변모된다. 이안 와트는 이 시기에 원작자들의 의도를 초월하는 의미를 얻는 단계로 이행된다고 말한다. 먼저 <근대 개인주의 신화>에서는 이런 대표적 경향으로 디포의 <로빈슨크루소>를 예로 든다. 경제적 개인주의, 현실적이고 실리적 철학, 노동의 강조, 고립, 자기중심성, 종교적 개인주의(근대적 개인에게 종교는 '일요일의 종교'라는 말로 중세적 의미에서 추락한다.) 등의 특징을 갖는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루소의 개인주의적 고립상태 ,마르크스의 노동과 여가,헤르더의 낭만주의 신화 등의 아이디어를 로빈슨 크루소의 특징을 설명하는 개념적 도구로 사용한다. 파우스트는 그럼 어떨까?  드디어 괴테의 손에 의해 인류의 고전으로 탄생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먼저 이안 와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의 '완전한 감정능력'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며 "나 자신의 자아를 무한히 뻗어 모든 인류의 자아를 끌어당기기" 를 원하는 일이다. 저자는 괴테에 있어 파우스트가 1/2부 사이의 구성적 절연 속에서도 '진정한 자기중심적 탐색'이라는 과정을 멈추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이 시기에 특히 부각되는 파우스트의 특징 중 하나는 '낭만적 사랑'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율배반적인 부분이 있다. 현실적으로 여성은 비천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그에 대한 반대 급부의 상상적 효과가 바로 '구원녀'식의 낭만주의적 여성관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외에도 괴테의 파우스트가 갖는 근대적 인간형의 증거 수첩에 변증법적 통일성 개념, 지적 엘리트주의, 경험과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등을 추가로 기록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20세기의 파우스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의 아드리안 레버퀸을 만나게 된다. 토만스 만의 이 소설은 당대 독일 역사에 대한 비극적 패러디의 운명을 갖고 있다. 이안 와트는 토마스 만에게서 '징벌적 개념'이 다시 부각되는 것을 읽는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종교적 의미와는 관련이 없다. 독일의 역사적 죄과에 대한 토마스 만의 신념이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궁극적으로 구원이라는 통합을 얻어내는 반면 만의 주인공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저자는 아드리안 레버퀸이 '가장 부정적이고 불쾌한 형태의 개인주의를 자기중심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그가 '진살과 개인' 모두에 등을 돌리는 형태를 나치즘과 연결시킨다. 즉 개인주의적 극단의 선택이 가장 반-개인적 신념에 봉사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토마스만은 '파우스트와 독일의 동질성'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파우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요약했지만, 이 책<근대 개인주의 신화>의 주인공은 앞서 말했다시피, 파우스트,돈키호테,돈후안,로빈슨 크루소 이렇게 4명이다. 저자는 이들의 탄생부터 즉 반종교개혁기-낭만주의-근대를 '개인주의'의 형성을 둘러싼 갈등과 통합의 드라마로 설명한다. 이 주인공들은 탄생의 시기도, 지역도, 변화 양상도, 극중 캐릭터도 모두 차이가 있다. 저자는 이 잘나고 이기적인 인물들 중 라만차의 돈키호테 캐릭터에 사랑을 표현한다. 시대와 갈등하는 이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이라는 것이 이유다.(그렇지 않겠는가?)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안 와트는 결론에서 궁극적으로 이들을 묶는 개인주의의 슬로건을 "나란 놈 단지 생겨먹을 대로 살아갈 것이다." 로 요약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 역시 주위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결국 이 4명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내적 심성 또는 가치관의 일부를 선취하고 구현한 부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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