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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저녁이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 놓은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튼 날의 아침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김명인,<천지간>중에서
상실은 사람을 부유(浮遊)하게 만든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언제 터질지 모를 거대한 고무풍선에 몸을 맡긴 것과 유사하다. 대부분은 운명의 여신이 다른 대상을 찾아 우리를 시큰둥해하며 내려놓을 때까지 묵묵히 올라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삶의 일정 부분은 운명의 여신들의 몫이라는 것을 수용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삶은 다른 '너머' 를 만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깨달음조차 우리의 인식과 실천에 항구적인 항체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매번 이름을 바꾸어 달고 또 다른 처방전을 요구하는 변종 바이러스같다.
아이들이 모여 산다는 '달콤한 내세'는 없다. 아니 역설적인 형태를 취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달콤한 내세'는 '쓰디쓴 현세'를 심장이 찟기는 통증만큼이나 강하게 인정하는 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상태이다. '젓과 꿀이 흐르는' 피안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천국'이니 '이데아'니 하는 류의 '내세' 따위는 없다. 그것은 도착적이며 기만적인 환상이다. 삶 너머는 아무것도 없다. 그 너머의 것은 애써 상상해보려해도 불가지의 영역일뿐이다. 불가지의 영역은 헤아려서 안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뿌리 뽑힌 존재론적 조건에 대해 우리는 비극적 전망 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애초부터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에 충실히 비극적 삶이어야 할까? 존재의 조건이 존재의 양식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생각은 즉물적이며 허무주의적이다. 우리는 오히려 부서진 채 -니체의 말처럼- 춤을 출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러니까 나와 니콜, 사고에서 살아남은 아이들과 살아남지 못한 아이들. 우리 모두는 이제 완전히 다른 마을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달콤한 내세에서 외딴 마을을 구성하고 사는 것 같았다." 러셀뱅크스,<달콤한 내세> P299
눈 덮인 뉴욕 북부의 시골마을, 평소와 다름없던 그날,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추락한다. 다수의 아이들이 사망한다. (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사적 정의감인 '분노'로 자신의 업을 정당화하는 합리적인 변호사 미첼 스티븐슨. 그는 이 사건의 원인 규명과 배상을 위해 희생자들의 부모들을 만나러 다닌다. 단순히 운전자의 과실이 아니라 도로의 상태나 안전 시설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 당국과 교육 당국에 막대한 배상을 목적으로 소송을 할 요량이다. 비교적 순탄하게 소송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사고 생존자 니콜 버넬을 만난다.
소설은 사건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동시에 마을 공동체의 가려진 모습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에서 니콜은 마지막 대사를 통해 '각자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이라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한다.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혼까지 이제 '다른 세계'의 마을 사람이 되었다. 각자의 '달콤한 내세'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우리라는 공통의 현존재들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죽음을 부여안고 사는 존재들이다. 마을 공동체가 죽음을 조금의 잔여도 남기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 안고 가는 모습에서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여기지만 결국은 타자의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통속적인 깨달음의 것과는 다른 차원을 만난다. 마을 공동체 전체와 그 구성원들이 죽음 자체를 삶의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서, 존재의 기본적 전제로 안고 가는 것이다. 죽음의 뼈를 그대로 드리운 채 삶을 이행하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삶의 본질로서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송이라는 법률적 절차를 통해 죽음의 직간접 원인에 대해 대속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방식이 변호사 미첼의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 반대방향을 향한다.
소설 속 희생자의 유족이자 베트남 참전군인인 빌리 안셀이 사건 이후의 삶을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와 비유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빌리 안셀의 개인적 경험에 의한 것이지만 결국 마을 전체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즉 마을 전체가 이제 아이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대면해야하는 요청에 맞닥드린 것이다. 영화 속 아톰 에고이안은 이런 죽음을 통한 삶의 영위라는 과제를 오래된 유럽의 구전설화인 '피리부는 사나이'를 통해 상기시킨다. 피리부는 사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사라져 버린 아이들의 세계에 사는 마을의 사람들은 어떤 존재적 변화를 겪어내고 강요받은 삶과 대화할 것인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은 평온한 마을 공동체의 이면과 삶의 다층적인 변부들을 보여준다. 우화적인 사회소설이 추구하는 추악한 공동체의 위선 같은 것과는 크게 상관없다. 물론 무탈한 마을 공동체 안에 도덕적인 흠결 등이 있고 그것이 사건의 중대한 반전을 쥐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소설이 마을이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도덕적 일탈을 고발하거나 집어내기 위해서 씌여진 것은 아님에 틀림없다. 근친상간의 트라우마는 사건 진행의 숨은 열쇠이며 사건의 방향을 변모시키는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된다. 그것은 결국 사고 피해자인 니콜과 돌로레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의 봉합과 새로운 지속을 위한 사건 전개상의 도구이지 그것이 공동체의 도덕성과 숨겨진 개인의 성적 음험함등을 고발하기 위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얼음길에 미끄러져 세상을 등진 아이들 말고도 사실 숨은 아이가 하나 더 있다. 변호사 미첼의 딸이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이 역할에 비중을 좀 더 많이 둔다. 그리하여 '변호사 미첼-딸/ 마을주민-희생된 아이들' 이라는 이중 구조가 연결된다. 영화 첫 장면도 변호사 미첼과 딸의 대화부터 시작된다. 미첼의 딸 조이는 부모의 이혼,마약과 방탕한 생활 등으로 이미 부모와는 척을 지고 있는 상태다. 오로지 마약을 구매하기 위한 돈이 필요할때만 뉴욕의 변호사인 아빠에게 읍소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조이의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비춰진다. 영화 포스터의 스틸화면으로도 알려진 그 이미지이다. 미첼의 과거 회상 장면인 것 같기도 하고 지금처럼 뒤죽박죽이 되기 이전의 어떤 평화로운 상태에 대한 이미지인 것 같기도 하다. 아톰 에고이안은 아예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딸의 친구와의 비행기 속 만남이라는 씬을 설정하여 변호사 미첼이 또 다른 방식으로 딸아이를 '내세'로 보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한다. 소설과 영화 둘 다 딸의 HIV양성반응이라는 전화장면을 통해 파국적이지만 단 한번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모종의 재회를 암시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영화 포스터로도 쓰인 평화로운 장면은 변호사 미첼의 인상적인 일화를 담고 있다. 앞으로 소설이나 영화를 보게될 사람들을 위해 일종의 예의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성 싶다. 그 일화 속에는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삶/죽음' 에 대한 은유가 담겨있다. 영화 속에서 버스가 추락하고 난 이후 다음에 등장하는 컷트도 바로 그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 미첼이 이야기 했던 그 경계선에서의 섬뜩한 '명쾌함'이란...참으로 ...(소설 속에만 이 '명쾌함'이란 단어가 나오는데...미첼이 들고 있던 소독한 면도날도 어쩔 수 없는 '명쾌함'이란 단어가 주는 예리함보단 날카롭진 못했을 것이다. 거기서 가장 적절하며 필요했던 단어가 바로 그 '명쾌함'이었다니 그것을 찾아낸 작가에게 경의를) 이 책은 어쩌면 '죽음의 그 명쾌함'에 대한 역설적 오마주, 그 절대적 불가능성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러셀 뱅크스의 <달콤한 내세>는 사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달콤한 내세>를 보고 난 이후 찾아 읽게 되었다. 영화가 좋을 경우만 하는 짓이다. 세간의 평가처럼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러셀 뱅크스의 소설은 사건의 진행과 주인공들의 사건 전후의 일상,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내면의 움직임등을 각 장마다 다른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입체화한다. 반면 아톰 에고이안은 주로 미첼 변호사의 시선과 생존자의 증언을 병치 시키고 있다. 대신 효과적인 교차편집과 인서트편집을 통해 사건을 둘러싼 내밀한 정서들을 표현한다. 매체는 다르지만 둘 다 매우 뛰어난 스토리텔러들임에는 틀림없다.
죽음이나 죽음을 통한 상실은 매일 분만실에서 신생아가 세상 빛을 보듯 발생한다. 병원에서, 차도 위에서, 쓸쓸한 여관방에서. 상실의 문턱을 넘어서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또 영원히 함께 하기도 마땅치 않다. 애써 그것을 떼어내려하는 것도 작위적이며 또한 지나치게 그것에 묻혀있어도 부자연스럽다. 결국 부서진채로 다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계속 물을 수 밖에 없다. 거대한 슬픔은 그런 질문을 정당화 해준다. 그리고 언젠가 행복이란 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쓸어담으며 오는 것은 아니라는 진부한 진실과 만날 때까지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그 질문과 대면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