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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여가수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평점 :
58년 개띠 형님을 안다. 중학교때 제도권 교육에 회의를 느끼고 뛰쳐 나온 사람이다.그후 10여년 독서와 소일로 자력갱생하다가 늦깍이 사회학도가 되었다. 그 형의 중학교 일이다. 수학 시간이었다. 요즘은 음수개념을 초딩때 배우는 걸로 아는데 그땐 중학교때 마이너스를 배웠나보다. 3의 음수는 -3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됐다고 한다. 즉 마이너스란게 도대체 어디 있는 수인가 말이다. 예를 들자면 책상위에 연필이 하나가 있다가 어떻게 없는 연필 두개가 더해지면 없는 연필 하나가 되는가? (수식으로 나타내면 1+ (-2) = -1 이 되는 상황이었겠지.^^ ) 궁금증을 참지 못한 어리한(?) 형님은 수학선생님께 강력히 어필하셨다. 결국 학교내 폭력의 당위성에 대해 충분히 내재화한 평범한 수학선생님은 형님을 향해 어퍼컷과 이단 옆차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손날 치기를 감행하셨단다. 이유는 간단하다.그러면 그런줄 알지 일부러 알면서 의도적 수업방해다. 바로 이게 그의 죄명이다. 아 ...교실 바닥에 버려진 휴지처럼 뒹굴던 형님.그분은 그때 결심하셨단다.' 나와 함께 할 곳이 아니구나. '.
물론 형님의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죄가 있다면 너무 조숙한 질문이며 당연한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대학쯤 가면 우리가 흔히 수학에서 당연시 하는 원칙들이 도출되는 과정을 배운다고 한다. 정말그런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흘려 듣기에 그런 당연한 수학상의 원칙들을 '공리' 라고 한다던데...
이오네스코의 <수업>이란 작품에는 뺄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과 이를 설명하려는 선생이 나온다.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선생은 점점 더 어려운 개념과 점점더 헛갈리는 예만을 든다.나중엔 본인도 언어의 붕괴과정에 도달한다.학생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선생의 언어는 학생의 이해도에 반비례하여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결국 그는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언어를 강제한다. 우리가 토론에서 또는 일상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폭력성과 권위주의는 <수업>이란 작품속에서 파멸을 길로 형상화된다. 지식의 정도가 다른 사람간에 또는 직장내 위계가 다른 사람간에 대화에는 늘 힘의 관계가 형성된다. 상대방 측이 아무리 민주적이며 열린 대화를 입으로 내뱉더라도 궁긍적으로 대화의 위계는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게 대화가 길어질 수 록 대화는 주입적인 형태로 바뀌어간다. 하지만 대화의 분위기만 좋다면 누구나 이 위계 관계의 폭력성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가 끝나면 열린 토론이었다는 식의 권력상위자의 입을 통한 흡족한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이오네스코는 <수업>을 통해 언어와 일상성이 가진 폭력성와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 대해 말한다.그리고 이것이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속적인 피해자 내지는 순환구조를 통해 말한다.끝없는 언어의 무의미한 반복은 <대머리 여가수>의 결론에서 두드러지는데 마치 뱀꼬리를 물고 도는 뱀을 연상시킨다. <대머리 여가수>의 경우 등장인물 6명은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단절된 인물들이다. 이들의 단절은- 다른 상황의 정보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므로 -언어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때문이다. 마틴부부의 대화는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다. 이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하나씩 찾아나가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그들이 수많은 다른 기억을 조합해 그들간의 관계를 인식한게 고작 서로 부부였다는 식이다. 일상의 대화란 것이 무의미한 음절의 남발이고 고작해야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의 병렬연결임을 작가는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무의미한 말들이다. 사실 그런 말들이 분위기를 돈독하게 하고 관계의 유연성을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의 의미성을 따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그러므로 이오네스코의 일상적 언어에 대한 풍자와 단절성에 대한 지적은 돌아볼 만한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실려있는 작품은 <의자>이다. 극으로 볼 경우를 상정해볼때 가장 흥미있지 않을까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단지 3명이다.하지만 이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40여명이 등장한다.아니 그들의 의자가 등장한다. 노인과 노파는 일생 일대의 발표를 준비한다. 물론 그들이 직접하진 않을 예정이다.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대표해줄 변사를 초대하고 많은 지인들과 저명인사들을 초청한다.초청했는지 자기들이 찾아왔는지는 희곡에 나오지 않는다.물론 중요한 사실도 아니다. 황제까지 자리를 하고 기자들도 초청된다.가슴이 얹힌 한을 풀어줄 변사도 마지막에 등장한다. 하지만 노인은 모든 것을 변사에게 맡기고 자신의 소임을 다마친다.허나 그렇게 기다른 변사는.... 으 므 므 므 ....이다. ^^ 언어에 대한 배신이다. 노인이 말하고자 했던 그 삶의 총체란 것은 결국 으 므 므...아 아 녕 .. 이다. 삶을 마친 노인도 허무하겠지만 보고 있는 관객도 허무하다. 사실 진정 허무해야 하는 것은 언어인데 언어는 인간이 아니므로 허무해하지 않는다. 사실 부조리극을 읽는다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각 문장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들이 등장하고 대화라고 보기에는 주고받음이 불분명한 말들이 부지기수다. 등장인물간에 상호관계성 조차 의심스럽다. 읽고 나면 무언가 본 것 같고 무언가 몽호한 느낌이 많이 든다. 하지만 그 몽환적인 느낌중 한자락이 와닿으면 그게 부조리극이 뜻한 무언가이자 전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ps) 기차는 달리고 복사기는 고장난다... 이런 장난해보면 재밌다. 맷돌은 도는데 TV는 언제 고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