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외가는 경북 고령이다. 방학때면 외가에 가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우선 멀리서 내려온 외손자에 대한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애틋함이 좋았다.그리고 신록의 우거짐이 내가 여름의 한복판에 와있음을, 즉 아직  나의 방학이 한창이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외갓집 앞으로 길게 늘어서있던 미루나무들은 마치 나를 반기는 도열식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하지만 몇년전 외할머니의 상여소리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그곳을 다녀온 이후 간 적이 없다.그때도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상여꾼들의 선창에 매미소리가 화답을 하는 형국이었다. 푹푹찌는 무더위에도 길가의 느티나무들은 장성한 잎을 반짝이며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소설 <현의 노래>를 읽으며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던건 수천년전 그 땅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풍광들이었다. 그리고 이어 그곳이 예전에는 가야의 중심이었다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생각을 했다.

최근들어 김훈의 활약은 눈부시다.늦깍이 데뷔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는 소설과 에세이들은 독자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상복도 많은 편이라 장편<칼의 노래>와 단편<화장>이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그리고 이 소설 <현의 노래> 역시 좋은 평가가 예상된다. <현의 노래>에는 김훈의 글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특징이 함축되어있다. 우선 그의 글은 힘이 있다.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글에서 조차 그의 글은 우직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문기자 경력이 주는 단문의 힘일 수도 있고 허무주의적 의식이 그의 문장에 기름기를 뺀 것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 순장에 대한 묘사에서 조차 그는 건조하다.물론 이것이 그의 묘사가 주는 서정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그의 묘사는 여러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마치 순장의 한복판에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김훈은 애상적인 장면에서 조차 관찰자로서의 거리두기에 충실하다.그리고 짧은 문장들로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한 인상을 남긴다.

김훈의 소설의 특징중 하나는 허무주의적 태도이다.<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가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라고 한다면 아마 허무주의의 반석일 것이다. 김훈의 허무주의는 불교적 허무주의와 맥락이 닿아있다. 이 소설에 수많이 등장하는 문장을 등식화 하면 이런 것이다. " A는 B가 아니다.그렇다고 B가 A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마나 한 소리 같고 조금 몽롱하게 들리는 소리이다. 하지만 불교적인 세계관에서는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김훈이 소리에 대해 밝힌 부분에서 그의 불교적 허무주의 세계관이 특히 들어난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다.

" 소리에는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다.마르지도 않고 젖지도 않는다.소리는 덧없다."

"사람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하기 때문이다.사람의 떨림과 소리의 떨림이 서로 스며서

함께 떨리기 때문이다.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이러한 비유는 이 소설 내에 여러번 등장하는데 즉 분별심에 대한 이야기이다.세상에 있는 만물이 있는 대로의 있는 것일 뿐 선악미추의 구분에서 욕심과 악행이 발생한다는 불교의 기초 원리이다.이 외에도 우륵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마치 선문답을 듣는 것 같다.분별심을 떠나보내려는 빈 마음 안에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라보는 애통함도 순장 행렬 앞에서 노래하는 소리와 춤도 얽혀 얽혀 녹아드는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우륵을 중심으로 삼각축을 구성한다.바로 대장장이 야로와 신라장군 이사부이다.이들 셋은 같은 나이이며  공유하는 의식이 있다. 작가는 세상을 건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이 다르고 그들이 세상을 건너가는 방식이 다르다. 우륵의 대칭축에 있음직한 야로는 쇠로 세상을 건널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움직임에 민감하다.그가 말한 쇠에게는 주인이없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승리주의적인 역사관이다.지극히 현실적이고 개인의 실리를 추구하는 야로에 반해 쇠를 신봉하지만 낭만적인 구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사부이다. 살육을 없애기 위해 쇠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이지만 쇠가 가져다주는 저 먼 세상에 대해 회의한다. 마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느낌과 일부 닿아있다. 우륵은 이미 가야의 멸망을 예단하고 소리의 영원성을 통해 이 세상을 건너려한다.소리는 살아있는 울림이며 스스로 울리는 것일뿐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우륵은 소리의 울림으로 가야의 노래를 현재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통속적으로 말하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것인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논리적 비약이긴 하지만 우륵과 야로를 보며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륵과 야로를 생각했다. 우륵으로 대표되는 계층은 예술가이고 야로는 테크노라트이다. 개인적 불행이라 생각되지만 내가 만난 예술가와 전문인들은 대개 비정치적이고 탈정치적인 입장의 사람들이었다.또한 스스로도 그러한 탈정치적 입장이 그들 고유의 권리인 듯 믿고 있었다. 19세기 브루주아들이 테크노라트들을 자신들의 계급에 일부편입시키며 세를 안정시키려했던 노력들이 이제는  고착화되어 그 일부가 된 듯하다. 우리는 일제 시대를 겪으며 수많은 우륵과 야로를 만났다.그들중 일부는 붓을 꺽고 총을 든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정치와 예술은 또는 정치와 전문지식은 별개로 규정짓고 그 안에서 자족하였다.특히 테크노라트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서는 기득권의 이익에 충분히 수혜받고 또 불리한 형국에 들어서면 자신들은 전문관료,또는 전문인일뿐이라고 슬쩍 발을 뺀다. 우리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례는 수없이 찾을 수 있다. 가야의 대장장이 야로의 후예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유한하며 그들이 만드는 역사 또한  그리 길지않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이 또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울리는 것은 소리가 그렇게 끊어질 듯 이어지며 늘 새로 태어나는 무었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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