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맘때가 되면 말러 교향곡 9번을 자주 듣게 된다.  

여러번 나누어서 들을 수 밖에 없다. 자동차 안에서도 조금 듣고, 잠자기 전에도 조금 듣는다.  

 한 악장이나마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없이 들을 수 있으면 그것도 행운이다. 아이들은 내가 혼자 음악듣는 것을 결코 그래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냥 배경음악이라도 걸어놓고 싶어서 몇 몇 CD를 플레이어에 올리면 곧바로 그걸 꺼내고  '놀이동요CD를 넣어 버린다.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만다. 살아있는 작은 아이들과의 시간이 죽은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보다 더 소중하다. 아이는 금새 어른이 될 것이고 그 음악들은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 처럼 묵묵히 나를 기다려줄 친구들일테니... 

책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아마 동화책일게다. 하루에도 반복적으로 몇 권씩 읽는다. 약속한 서너권의 책을 마치고 아이가 잠들고 나면 그제서야 책을 위한 나의 시간이 조금 열린다. 하지만 몇 장 넘기다 보면 내게도 졸음이 찾아오고... 

 봄 꽃보다 화사한 가을 단풍도 사그라드는 계절이다. CD 장에 CD가 채워지고 책장에 책이 느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나무도 저렇게 자기 몸을 터는데 자꾸 늘어나는 뱃살처럼 그런 것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아직 이 친구들은 다이어트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아직은 수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같은 것때문이겠지.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허리가 30을 넘기고 채중계도 다른 단위의 수치를 가르치게 되는 줄도 모르고. 

 말러 9번은 '이별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말러 교향곡의 전통적인 주제이기도 한데 특히 '대지의 노래'와 연장선 속에서 그리고 악명 높은 교향곡 9번을 둘러싼 불길한 소문들 속에서 이 작품은 시작된다. 말러와 당대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지휘자 빌헬름 멩겔베르크는 이 교향곡을 '사랑한 모든 이에 대한, 세계에 대한,예술, 삶, 음악에 대한 이별'이라고 칭했다.  

 

 

 

 말러의 세계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사이의 대립 속에 구성된다는 큰 특징이 있다. 그로 인해 범우주론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퇴페적 애상미를 띄고 있다. 즉 말러의 음악적 내용물들은 당대 어느 누구보다 세속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의 음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영원한 빛'이라는 초월적 평화다.  

 말러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해석과 청취가 말러의 의도와 더 가까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죽음'이나 '이별' 또는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해서 그와 똑같은 태도를 함께할 필요는 없다. 

<나는 하나의 노래 이 곳을 지나간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온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모종의 서늘함이 있다. 인디언 쇼니족 테쿰세 추장의 말이란다.

 "죽을 때가 되어서 마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 처럼 되지 말라. 그들은 죽음 앞에서 울면서 그들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조금 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죽음의 노래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사처럼 죽으라."   

돌아가는 계절 11월이다.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헤센 심포니오케스트라 (과거 프랑크푸르트방송교향악단이라고 불리웠다)  말러 교향곡 9번 1악장 안단테 코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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