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길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혼자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고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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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영미는 이 시를 읽고 나서 그간 알았던 모든 시인을 버렸다고 한다. 또 교과서에- 최영미 시대의 교과서겠지, 이 시는 요즘 교과서는 아니어도 참고서에는 나오는 듯 하다- 실린 시들과도 작별이었다고 말한다. 문학소녀 최영미의 발견이 아니었나 싶다.
네이버 검색에서 시를 퍼나르기 위해 검색했더니 지식in 이라는 곳에서 '이 시의 구조는' '이 시의 주제는' 뭐 이런 식의 해설이 나온다. 나는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이런 것들과 이별한 사람이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시의 구조, 시의 주제, 시어의 함축된 의미 등을 아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 속맛을 느끼기에 그런 도구들도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제일 먼저는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시'를 느끼는 거 아닌가 싶다. FEEL IT...?
내가 최소한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은 절대로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국화 옆에서>를 보고 고등어 속살 같은 그 맛을 감상한 여력은 거짓말 단 한마디 안 보태고 전무했다. 물론 그건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시간이 그런 힘을 키워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말이 어런 놈들은 시의 형식이나 상징의 의미나 알고 넘어가면 된다뜻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내게 시가 제대로 찾아온건 시간이 많았던 대학와서다. 그냥 '시' 나 한번 읽어볼까 하고 읽던 그런 시선집 속에서 말이다. 그때 시어들은 오징어 배를 가르듯 쑤욱하고 몸 속으로 들어왔다.
결국 이런 기회를 막는 것은 바로 시의 구조와 형식,의미,표현의 특징,상징된 것의 의미를 서너가지 옵션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말하는것 교육 때문이다. 도대체 이건 뭘 느끼게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완전 '싸구려 커피'다. 시험용 텍스트로 시를 만나게 되면 그런 방식 밖에 없다. 밑줄 긋고 무언가 받아 적고. 내가 보기에 교과서에 실린 역대의 명시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호사를 누리게 되지만, 반면에 '진정성'으로서의 시의 역할을 반쯤 접게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각서와 교환된 것이다. 이 시를 다시 만나려면 아주 멀리 돌아와서야 가능하다. 마치 국화꽃 앞의 그 누이처럼.
2.
아말피의 밤노래
-새라 티즈데일
별이 빛나는 하늘에게 나는 물었네/내 사랑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하늘은 내게 조용히 대답했네/ 오로지 침묵으로.
어두워지는 바다에게 나는 물었네/저 밑에 어부들이 지나가는 바다에/바다는 내게 조용히 대답했네/ 아래로부터의 침묵으로.
오, 나는 그대에게 울음을 주고/ 아니면 그대에게 노래를 줄 수 있으련만/ 하지만 어떻게 침묵을 주리오/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침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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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어.의인화된 질문. 환유적 전환. 질문-대답의 대칭구조...참 심심한 시다.
그런데 나는 왜 마지막 시어를 보고 밤 11시 잠자러 들어가는 아내를 붙잡아 새웠을까? 이거 좀 봐...
아.."하지만 어떻게 침묵을 주리오,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침묵을" ....하...이걸 어떻게.
사랑,영원,죽음,삶의 태도...서로 앞만 보고 있는 묘석들, 별빛을 바라보고 누운 이름 모를 와불, 논 바닥 한 가운데 있는 부서진 석탑, 퇴근길 산 위에 걸린 푸른 달, 며칠 전 DVD로 본 영화<오션스>에 나오는 거대한 고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무지개 너머. 기러기들을 끌어당기는 자기장의 중심, 영화<해피투게더>에 양조위가 찾아가는 세상의 끝. 그리고 그 절벽. 영화<화양연화>에서 앙코르와트 탑사이로 넣어버린 양조위의 편지. (라캉의 '수신인이 없는 편지'에 대한 비유가 생각난다.) 지워져 버린 전화번호 목록, 왼쪽이 조금 무거워 보이는 식탁 다리. 꺼지는 찰나의 가로등. 그리고 그 외에 기타 등등
나는 이 모든 걸 생각했다. 구조니 형식이니 하는 것은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교육의 분류표에 따르면 나는 시에 대해 모르는 거다.이게 서정시인지 서사시인지, 모더니즘인지 상징주의인지...
그렇다면 매일 좋아라하는 말로 "철학,인문학,철학,인문학..."하는데 철학적인 질문 좀 해보자.
무엇이 시를 읽는 것인가? 무엇이 시를 아는 것인가? 내가 아는 한 어느 교사도 그걸 답해줄 수 없으며, 어느 참고서도 설명해 줄 수 없다.
동시를 즐겨 읽고, 또 노래로 부르던 아이들이 점점 시와 멀어지게 되는 건, 1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사보지 않게 되는 건, TV와 게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교과서식 해석의 강요,해석에 대한 과도함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내 대증요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
"그냥 시를 내버려 둬!"
(추가된 사족)
지금부터 한 10년전 쯤 지금 아내가 된 여자와 함께 안치환 콘서트에 갔다. 그 때 막간가수로 이지상이라는 가수가 나왔다. 만주 독립군과 관련된 내용의 노래였다. 그 노래를 딱 한번만 들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만주 벌판을 누비던 그 노인네'와 '이 좁은 바닥에서 헤메는 나' 사이의 심각한 격차때문이었다.
노래 제목도 모르고, 처음 듣던 노래라 가사도 충분히 듣질 못했지만..'그 노인'과 나의 스케일 차이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안도현 시인을 패러디 하자면 '노인들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라고 할만큼. 북방의 만주 벌판을 뛰던 사람과 어찌 나를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시 이 처음 듣는 노래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연히 유투브에서 노래를 찾았다. 이지상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곡이다. 브레히트의 시 제목을 곡 제목으로 사용했다. 이건 민병일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이건 시인데 그 이유가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이걸 목 놓아 이야기하는 건 나도 좋아하는 주제지만, 아무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아무 순간에나 이걸로 결론 짓고 싶어하는 건, 아니 그리로 가고 싶어하는건 한마디로 '과함'이다. 이 시가 좋은 건, 시의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도 아니다. 아름다운 시어와 운율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런 의미로는 별로 좋은 시가 아닐 것이다. 대신 이것은 날것인 채로 그대의 가슴을 그대로 노린다. 그러므로 시가 된다. (그리고 한마디 음악적으로 덧붙이자면 "아..위대한 포크의 전통이여." )
다시, 나도 잘모르지만, 시에 대해 질문을 하자. 무엇이 시인가? 어떻게 시를 읽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