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일이 있어 회사를 나갔다가 조금 일찍 퇴근해 버렸다. 집 근처 서점에 들렀다. 인터넷으로 본 책들도 넘겨보고, 또 우연히 눈에 걸린 책들도 넘겨봤다.
두 권의 시집을 사들고 왔다.
하나는 짙은 감빛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과빛이다.
최영미시인이 고른 <내가 사랑하는 시>이다. 외국시집은 강한 전류가 한순간 이라도 흐르지 않으면 잘 사보게 되질 않는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몇 몇 유명한 시인들 외에는 사실 외국시인들에 대한 정보도 많질 않다.
내가 가장 최근에 산 외국 시집은 스웨덴 토머스 트란스트뢰메르 시선집인 <기억이 나를 본다>이다.
출판사 '들녘'에서 나오는 외국시선집 시리즈 중 하나인데 곧 다른 시집도 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대가 되는 시리즈 중 하나인 셈이다.
서점에서 <내가 사랑하는 시>를 뒤적이다가 두 눈에 콱 박힌 시가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이지도 않았다. D.H로렌스의 <자기 연민>이란 시다..
결코 야생의 것들이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 보지 못했다.
작은 새는 가지에서 얼어죽어 떨어질 것이다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 추호도 하지 않으며
모과빛 시집은 아직 알라딘에 없다.
내가 즐찾해 놓은 박남준 시인의 블로그에서 사진을 가져왔다. 이번 주 월요일에 나온 시집이니 아직 따뜻하다.

<그 아저씨네 간이휴게실 아래 그 여자의 반짝이는 옷가게>
“하동에서 구례사이 어진 강물 휘도는 길 / 비바람 눈보라치면 공치는 날이다 / 집도 없고 포장마차도 없는 간이휴게실이 있지 / 고물 트럭을 개조해 만든 / 국수와 라면, 맥주와 소주와 음료수와 달걀과 커피 등등 / 전망 좋고 목 괜찮아 오가는 사람들 주머니가 / 표 나지 않고 기분 좋게 가벼워지는 동안 / 눈덩이 같던 빚도 갚고 그럭저럭 풀칠도 하는데 / 빌어먹을 / 그 아저씨의 그 여자는 암에 덜컥 발목을 잡혔다 // 소원이 있었댄다 꿈 말이지 웃지 말아요 정말이라고요 / 반짝이는 옷을 입고 밤무대에 서는 가수 /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깊이 모자를 눌러 쓴 그 여자는 / 아저씨를 졸라 간이휴게소 아래 / 얼기설기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 선풍기도 난로도 아니 전등도 하나 없는 / 간판도 없는 두어 평 비닐하우스 무허가 옷가게 / 어려서나 더 젊어서 한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 반짝이는 반짝이 옷, / 너울너울 인형 같은 공주 옷을 파는 그 여자의 옷가게 / 그녀에게서 사온 옷을 안고 잠을 청하면 / 푸른 섬진강물이 은빛 모래톱 찰랑찰랑 간지르는 소리 / 동화 속 공주가 나타나는 꿈 /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 구례에서 하동사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짝이는 옷가게 / 그녀가 웃고 있다 서비스 커피도 한잔 준다”
책 뒤에 '시인 박남준 연대기' 가 있는데 한껏 웃었다. 입 싼 안도현 덕분에 입에 풀칠한 사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