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단 하룻밤의 이야기이다.그러면서 또 41년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이 소설을 보며 올 하반기 최고의 한국영화 [올드 보이]를 떠올렸다.소설과 영화가 복수를 드라마의 기본 소재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악연의 고리를 푸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먼저 영화[올드보이]는 15년간 영문도 몰래 갖힌 남자의 복수욕망과 그를 가둔 자의 15년이 넘는 자기파괴적 복수욕망을 상치시킨다.그리고 박찬욱감독의 스타일대로 하드보일하게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준다.반면 산도르 마라이는 훨씬 정신적이고 근원적인 방법으로 복수의 길을 찾는다.그가 찾은 복수는 삶에 대한 용서와 삶의 진실에 대한 질문이다.

가장 믿는 친구로부터의 배신을 통해 주인공은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그러나 분노는 점차 삶의 근원을 향한 내적질문으로 변해간다.주인공은 잊을 수 없는 배신의 날로부터 41년을 기다려 친구의 방문을 통보받는다.그 암울한 기억의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며 주인공은 담담하게 친구를 맞는다.배신의 기억의 한 축을 만든 장군의 아내만이 부재하다.산도르 마라이는 이미 노인이 되버린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거역할 수 없는 삶의 열정과 그에 따른 모순을 담담하게 설명한다.

주인공 헨릭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주인공은 진실을 알고 싶어했고 그리고 그는 고독을 통해 진실을 이해했다.인간의 의지와 도덕,책임같은 것 만으로 제도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이해한 것이다.그리고 배신의 결과 죽는날까지 다시 만나길 거부했던 부인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가장 쓸쓸했던 사람은 바로 부인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다.자신의 분노와 친구의 비겁함으로 인해 두번의 버림을 받는 자의 고통을 안것이다.

이 소설은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 인식의 논리를 근원에 깔고 있다. 멀리 그리스까지 갈 것도 없이 20세기 초 토마스 만의 소설<토니오 크뢰거>나 헤르만 헤세의 소설<지와 사랑>등에서 우리는 쉽게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을 찾을 수 있다.토마스 만은 예술가와 부르주아 공민세계 편입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을 그렸다.헤세는 두 수도사를 통해 디오니소스적 세계와 아폴론적 세계를 표현해냈다. 20세기 초 유럽소설의 전통이었든 플라톤을 정점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전통이었던 산도르 마라이 역시 이 전통을 따르고 있다.

주인공 헨릭의 세계와 콘라드의 세계는 그들의 성장과 함께 색깔을 달리한다.헨릭의 아버지는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비극의 단초는 콘라드의 세계에 속한 크리스티나가 이질적 세계로 편입되면 발생한다.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이 과연 적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문학적으로 매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그리고 경험적으로 비추어 봐도 양자의 가치관이 실재에 현존한다는 생각도 가끔은 든다.물론 대부분 사람은 세속적인 이해관계속에서 합리적이라고 가장된 속물적 근성에 기대어 산다.하지만 내면의 움직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세계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그리고 결국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게 된다.산도르 마라이도 말하듯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 만큼 행운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굳이 결혼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같은 가치의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인공 헨릭은 내면의 색깔을 파악하기엔 너무 유복했고 행복했다.그러므로 젊은 날의 그는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도,제도로써는 막을 수 없는 삶의 열정도 이해할 수 없었다.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분법적 세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평범함 나로써는 그의 선량함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삶은 그렇게 한 줄의 문장이나 한가지 변수로 측정할 수 없는 열린 다항함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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