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고,역사라는 일람표 위에 갈겨 쓴 낙서처럼 인간집단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그 존재는 현실인가 꿈인가,좋은가 나쁜가,귀중한가 무가치한가?'

남진우의 해설 앞에 인용된 로베르트 무질의 글이다.남진우의 평론은 대충 큰 제목만 보았다.(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은지 오래지 않아서 그랬나....) 사실은 책을 읽은 나름대로의 감동을 남진우의 생각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질에 대한 인용은 정말 훌륭했다.이 책의 모든 걸 단 몇줄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책에는 20세기 전반부를 살다간 '한여름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들이 수두룩하다.그가 양반이든 도둑이든 악질 통역이든 모두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일포드 호가 제물포항을 떠나 항구의 뜨내기들 눈길에서 아득해져가는 순간 부터 그들의 존재는 차즘 지워져갔다.그들의 존재를 기억하기엔 본토의 다수가 겪은 역사의 질곡 또한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포드라는 인종의 용광로,붕괴되어가던 조선계급의 열가마 속에서 잊혀진 자들은 그들만의 삶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비록 금새 탄로나 버렸지만 꿈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들,잊혀진 소수자의 이야기이며 그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긴 이야기이다.아래 어떤 글을 보니 이 책을 보다 외국인 노동자를 떠올렸다는 내용이 있다.논리적으로 무리가 없는 생각이다.유카탄 반도의 조선동포가 사회적 역사적 소수 였듯이 외국인노동자들 역시 그들의 본토의 역사에서 타자화 되고 있으며 꿈을 이루겠다는 이곳에서도 타자가 되고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상상은 물론이고 존재 자체를 딱히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공간과 시간.마치 존재 이전의 무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통신이 발달된 요즘도 마찬가지이다.예를 들어 영국의 아일랜드 위에 극지방 가까이 '아이슬란드'란 나라가 있다.그곳에 어떤 사람이 어떤 언어를 쓰며 어떻게 사는지 아는가? 난 tv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일포드의 조선인 역시 본토의 사람들에게-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였다.그들은 결국 대부분 다수가 겪은 일제시대라는 역사의 줄기를 벗어나 멕시코 혁명의 줄기를 타게 되고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작가는 이 과정에서 외국 사회에서 근대화를 겪는 조선인의 혼란을 그려나간다.

물론 당시의 조선 역시 식민지적 근대화가 추진되고 있었다.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런 근대화를 더 직접적이고 생존과 관련하여 취급한다.계급의 붕괴와 주체적 여성상,외래종교와 토속종교의 갈등,농민반란과 정치적 근대의식등이 그것이다.이런 주제들은 하나 하나가 지난 한국 소설의 소재가 되었던 것들이다.작가 김영하는 유카탄 반도의 조선인이 겪는 문화적 충격과 적응,생존을 위한 투쟁을 이러한 주제들과 잘 섞어서 보기 좋은 그릇을 만들고 있다.그러다 보니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근대 조선의 전형적 인물형들을 전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몇개의 장면은 박수무당이 파하촌에서 펼치는 굿판과 파계 신부 박광수의 죽음 장면이다.둘 다 이국적인 장면이다.메마른 에네켄농장의 밤을 밝히는 어지런 불빛과 무당의 굿소리.궁정내시 출신의 악사가 부르는 피리소리 까지 더해진다면 당시 그들의 마음이 지면을 뚫고 시간과 공간을 헤치고 이곳 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박광수는 이정과 함께 과테말라 내전에 참가하여 마야의 피라미드 위에서 웃음과 함께 사라진다.총소리,웃음....사라진 한. 푸른 융단과 같은 밀림속 피라미드 정상에 영원히 신전과 함께 잠드는 것이다.

이 책은 모든 인물이 다 주요인물이다.이정과 이연수의 닿지 못하는 사랑이 독자를 위한 로맨스의 한요소로 힘을 발휘하지만 그들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전장을로 이정을 끌어들인 뒤 배신한 조장윤도 이연수를 끝까지 지켜주는 이발사 박정훈도,저주를 남기며 죽은 박수무당도 모두 잊혀진 역사의 주인공이다.유카탄 불볕아래 사라진 눈송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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