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 찰지고 맛있는 사람들 이야기 1
박형진 지음 / 디새집(열림원)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2년전인가 혼자 변산반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한적한 해안도로를 따라 내소사를 찾는 길이었다.시간마저 수면제를 먹은 듯 흐느적거렸다.졸음에 겨운 눈을 들어 무심한 논길을 바라보았다.흐릿한 망막 속에 어느 농부의 밀짚모자가 들어왔다.흰색 메리어스에 구리빛 종아리.푸른게 자라는 벼와 멀리보이는 섬 그림자.그 농부가 왠지 외로와 보였다. 아마 곧 비가 올 듯 한 날씨때문이었을 것이다.

모항에 가본 적은 없다.그런데 박형진 시인의 책을 보면 모항 한복판에 와있는 듯 하다.갯벌에서 살아 숨쉬는 조가비의 소리가 들리고 꽁짓배의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이런 글은 그 곳에 사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펄펄살아 있는류의 글이다.문장이 세밀하지도 날렵하지도 않다.한 문장이 대여섯줄이 넘을 만큼의 만연체에 묘사도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하지만 박형진 시인의 이 책에는 멋진 글이 가득하다.아마 흰종이위에서 본 것이 까만 글씨만은 아니였기 때문일 것이다.거기에는 구릿빛 피부에 누런이빨이 성근 모항사람들이 얼키설키 큰목소리를 내어 설레발을 펴고 있었다.

이 책은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첫 부분은 모항 사람들의 이야기이다.여기에는 시인과 동시대에 사는 현재형의 사람도 있고 또 박 시인의 기억 속에서 살아난 사람도 있다.이들이 모여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든다. 둘째 부분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곡식과 농사 이야기이다.보리고개와 관련된 이야기부터 콩,고구마,녹두 등 시골에서 자랐을 사람이면 누구가 하나쯤 이야기꺼리가 있을 법한 소재에 대해서이다.

개인적으론 모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고 흥미롭다.그들은 모항의 역사이다.그중 가장 기억남는 사람은 고막녀이다.예전 시골에는 한 마을에 꼭 누군가 한 두명쯤 모자란 사람이 있었다.그래서 동네아이들의 놀림감도 되고 또 한참 많은 나이인데도 친구도 되고 그랬다.내가 살던 동네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내 친구의 형이었다.근데 아무도 그를 형이라 부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그의 호칭은 꼬마에게도 조금 나이든 어린아이에게도 공히 '바보 상국'이었다.나보다 한 열살쯤 많았던 것 같다.항상 푸른 츄리닝에 콧물이 덕지덕지 묻은 소매를 하고 다녔다.영화[살인의 추억]에 보면 나오는 그 친구-향숙이는 예뻣다-하는 그 친구와 비슷했다. 왜 그렇게 다들 비슷했을까? 아마 박시인의 고막녀는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지체장애우 친구들의 모습일 것이다.책을 보고 있으면 그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고 그녀의 비극에 서글픈 맘이 생기기도한다.

그외에도 이 책에는 술주사 서금용씨,눈끔적이,오징개 양반등등 재미있고도 또 한편으론 가슴 아픈 서민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이들이 엮어 놓는 삶의 씨줄과 날줄은 마치 이 책이 소설인양 착각하게 만든다.이문구나 김주영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모항에 바글바글 모여 서로 각축을 벌이는 듯 하다.그만큼 다양한 삶의 형태와 모습들이 박시인의 찰진 시심에 담겨 우러나오고 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박 시인의 아들출산 이야기이다.특히 시골은 남아선호가 강하다.생산력과 관련된 생존의 문제이기에 강남 부유층의 남아선호 원정출산과는 질이 다르다.박시인을 비롯해 당시 모항사람들의 출산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다.남자아이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웃지못할 에피소드와 시골아낙들의 말빨(?)은 진짜 살아있는 웃음이 무언지 알게한다.

박시인은 막내 아들 보리-이름이 참 예쁘고 그 의미까지 알면 더욱 예쁘다-를 길에서 낳았다.도움을 청한 시골 아낙이 시어머니를 데리고 오는데 그 시어머니가 또 박시인의 어릴 적 동네 누님이었단다.이런한 우연과 따뜻한 출산광경을 도시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요즘 부안은 핵폐기장 문제로 아주 시끄럽다.시인의 마을과 가까운지는 모르겠다.시인도 시위에 참여했는지도 모르겠다.하여간 고향을 지켰던 순한 사람들이 왜 각목과 섬뜩한 구호로 무장했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이 책을 덮자 자꾸만 모항사람들의 웃음과 tv속 핵페기장 반대구호가 귀를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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