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놀 줄 아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건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예전에도 이런 류의 페이퍼를 쓴 적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에는 늘상 전교 1등을 도맡는 친구들이 문과와 이과에 각각 한 명 씩 있었다. 이 친구들의 수준은 한 차원 위였던 것 같다. 그래서 좀 처럼 1등을 노리는 자는 몇 업었고 2등 부터가 우리에게 할당된 자리같았다. 그런 문이과를 대표하는 이 수재들은 희안하게도 스타일이 달랐다. 문과 1등하는 친구는 정말 공부 잘하는 아이의 전형이었다. 생긴것도 지적으로 생겼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밥 먹을 때도 사전을 펴놓고 공부하는 스타일이었다. 운동을 해도 구기종목은 잼병이었는데 체력장에 나오는 기초 체력종목들은 정말 잘했다. 인간미도 살짝 없었다. 반면 이과 친구는 생긴 것도 MC몽처럼 생긴데다가 자율학습 땡땡이도 잘치고, 월담도 잘했다. 집은 좀 가난했지만 해맑았다. 처음보는 친구들하고도 쉽게 어울렸다. 오죽하면 나랑 과도 다른데 내가 수학문제에 막히면 이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했을까?  

내가 보기에 문과 1등하는 친구는 '공부'와 접촉한 '기계' 였다.이 친구는 대학 3학년 때 행정고시에 재경부문에 합격했다. 재경부인가 통상부인가에 갔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대학 들어가자 마자 아마  '행시 모드'로 전환해서 열공을 했을 것 같다. 최소한 연애질 하다가 실패해서 헤롱거린다거나, 무모한 혁명의 이상때문에 길바닥에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런 '비합리적'인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짓을 하면서 대학 3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아마 그런 간지대로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을 것이다. 초지일관하게 말이다. 내 소망은 그렇게 일관되게 살아온 그가 부디 그 뛰어난 머리로 대다수의 못난 국민들 거품 물게 하는 정책들을 입안하고 추진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는 자기 목표 이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낭비적인 것, 부차적인 것, 불필요한 것들로 간주했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중요한 것들'의 순위에서 하위로 배치하여 언제든 순위에서 밀렸을 것이다. 그라고 욕망이 없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모든 욕망을 자기 목표와 절제의 힘으로 눌렀다. 그는 '놀지 않는 아이'였던 것이다. 

자기 목표를 위해 열심히 뛰는 프로는 아름답다. 박지성의 발,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김연아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자기와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사다. 문학적으로 니체를 인용하자면 모두 '삶의 전사'인셈이다.  

문과 1등을 했던 그 친구는 '공부'라는 재능을 가진 '박지성'이나 '김연아'같은 전사가 아닐까? 그는 아마 오른쪽 손에 볼펜자국에 눌린 근육이 불거졌을 것이다. 발과 손의 차이이고, 국민 스타와 행정부 고위 관리의 차이일 뿐, 이들은 같은 도식을 가졌다. 문화연구적 입장에서는 박지성이나 김연아는 '영웅으로 만들어진' 미디어 시대의 영웅이다. 그리스의 영웅이 '신과 운명' 사이의 인간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비인간적 존재들이라면 박지성이나 김연아는 21세기 미디어와 스포츠 산업이 나은 인간적인 영웅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 개인의 노력을 폄훼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들의 자기극복을 위한 열정과 노력은 영웅의 대접을 받을 만 하다. 물론 이런 스타들에게는 명예와 부라는 개인적 부상이 따른다. 살아가면서 그런 존재들은 여러 모로 필요하다. 가끔은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어떤 꿈들에 대한 투사가 가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좌절을 겪을 때 용기를 주기도 한다. 김연아나 박지성의 성공이 순탄했던 것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범한 우리의 삶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 자기 수련을 하느라 포기해야했던 '노는 삶'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건 '평범한 삶'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치의 역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게 '좋은 삶이고 즐거운 삶'이다. '노는 삶' 말이다. 버스를 타도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삶, 자기 스스로 타인이 알아봐 줄 기대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삶, 공항에서 VIP실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삶. 굳이 '자기 극복'이 되면 좋지만 안되도 "인생이 그렇지 뭐.." 라고 씩 웃을 수 있는 삶.  

 나는 그래서 너무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 보다 좀 즐기려는-최소한 즐겨보려고 애쓰는- 아이들이 좋다. 모케이블에서 아메리칸 아이돌을 모방해서 슈퍼스타 K라는 프로그램을 했다. 우승 후보중에 조문근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처음부터 '즐겁게 놀기'가 목표라는 듯 출전해서 결승까지 갔다. 물론 그게 처음부터 설정일 수도 있었지만 하여간 생긴 것 부터가 좀 놀게 생겨서인지 나는 이 친구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는 사실 '놀아도 된다'는 약간의 자만심 같은 것도 있어 보였다. 이 친구는 중간에 한번 떨어졌다가 패자부활전을 통해 구제되는데, 그 와중에도 그다지 원통해하거나 슬퍼하거나 하지 않았다. 예의 그 오만함, "잘 놀았는데요 뭘" 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우승후보자가 좁아지면서 욕심이 생기기도 했을 거다. 물론 최종에서도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게다. 어쨋거나 이 친구는 2등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친구의 '재야 딴따라' 근성이 아주 맘에 들었다. "지금까지 고생을 했고, 앞으로도 그걸 건데. 여기서 잘되면 좋고 아니면 잃을게 없는데, 뭘." 하는 어찌보면 탈속적인 유희. 전복적 놀기. 그래서 이 친구는 못 생긴 만큼 자유로와 보였다. 그에 반해 구구절절 사연과 함께-노는 친구라고 사연이 없겠는가?- 반드시라는 의욕을 너무 드러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안쓰러워 보였다. 물론 방송은 이런 둘 다를 원한다. 방송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저 밍숭맹숭한 것이지 '더 나쁘거나 더 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니 '전복적 유희'라는 것도 이미 초월적 위치에 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이라면 손발 부르트게 안타까와하는게 맞을까? 주체에 '늘'이란 족쇄를 씌우지는 말자.) 

사람들은 다들 이런 '노는 가치'를 좋아한다. 그런 책을 읽고 좋아하고, 그런 영화를 보고 감동한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슈퍼스타 감사용>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그래 맞아" 라며 맞장구를 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눈은 언제나 TV 속, 역사 속, 책 속의 '영웅'에 맞춰져 있다. 내 친구 중에 하나는 위인전이나 평전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듣고 보니 나름 일관된 철학이 있다. 남들이 다 체 게바라 T 셔츠를 입고, 포스터를 붙여 놓고 다녀도 그는 영 관심이 없었다. 사실 체 게바라 이미지의 소유행위와 달리 삶과 정치가 더 체 게바라적 가치와 가까운 녀석인데도 말이다. 그에게 그건 '뛰어난 영웅의 이야기' 일 뿐이다. 편벽된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 친구가 그런 행동을 통해서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바는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 역시 '잘 놀고' 있다. 자기 삶을 충분히 즐기고, 자기 방식으로 투쟁하면서 말이다. 

박지성이나 김연아가 될 게 아니라면... 차라리 잘 놀자. 잘 놀아야 ...2등 해도 억울하지 않다. 공부 못하면 수영 잘하면 되고, 축구 못하면 야구 잘하면 되고, 스케이트 못 타면 낚시잘하면 되고...참고로 나는 '잘 놀아야 된다'는 말을 늘상 '연애를 잘해야 한다' 라는 메타포에 실어서 이야기한다.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내가 '연애 지상주의자'인지 안다. 그런데 맞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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