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내가 속해 있는 팀의 팀장이 명예퇴직을 했다. 당시 회사는 술렁였다. 인간적인 흠결들을 떠나서 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 등이 강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직종의 후배인 내가  보기에도 그는 업무적인 면에서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모종의 순수함같은 것도 지키고 있었다. 또한 내가 있는 직종 출신으로는 간부회의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 팀의 입장을 전하려면 싫으나 좋으나 그를 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역시 중간 간부로서 회사와 직원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 뒤에 온 팀장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 스트레스를 본인이 다 감당한 편에 가까왔다. 이후 팀장들은 회사 경영진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말들을 시시콜콜 전체회의에서 전달한다. 마치 고장난 녹음기처럼. 어쨋거나 회사가 주는 스트레스로 그는 신경계에 스트레스성 질환까지 생겼다. 그리고 몇 달 후 자진해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나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안타까와 했다. 

하지만 난 이 양반과 불가원불가근의 관계였다. 그의 정치적 위치-즉 그가 같은 직종으로 위협받는 현재의 권리들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해 지지를 보낸 것이다. 이 양반은 가끔 술 먹으면 개가 되곤 했다. 기분 좋은 술자리에서도 점점 술이 과해지면 폭언과 폭력이 일상적이었다. 내가 겪은 것만도 한 두가지가 아닌데....칠 팔년전 쯤인가 오후 5시쯤 갑자기 낮술을 먹다가 내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회사 앞의 술집인데 X빠지게 뛰어오라는 거다. 부랴 부랴 내 동기랑 뛰어갔더니 무릎 끓고 앉으란다. 시키는대로 했는데...그 때 부터 밑도 끝도 없이 "너희 xx놈들은 X라 맘에 안들어. 너희들이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 " 하여간 이런 식으로 다그치는 것이다. 자기가 계속 호통을 치다가 다시 한숨 가다듬도 또 밑도 끝도 없이 분통작열. 하여간 어처구니 없었지만 그냥 눈 깔고 있었다. 속으로 부글 부글... 

그런데 결국 그것도 맘에 안든거다. '너희가 최선을 다하고 있냐고...이 XX새끼들아...너희들은 다 자격없어" 뭐 이러다가 컵에 든 물을 얼굴에 확 끼얹는 것이었다.  

아...그 순간 임계점까지 갔다. 아 못참겠네 쓰발...술상을 엎어..하는 순간까지 온거다. 그 때 술자리에 동석했던 사람이-그 양반과 호형호제 하던 사이인데- 큰 일나겠다 싶어서 "아...형 많이 취했다. 다들 잘 하는데 왜 그래요? 하면서 그 양반을 반강제적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 양반을 거의 끌려가면서도 헛발길질을 해 댔다.  

나와 내 동기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서로 얼굴만 보면서 씁슬한 한숨만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 양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타났다. 

이후에도 대상을 바꿔가면서 이런 일들은 툭하면 일어났다. 

한번은 낮술을 먹고 들어와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자기 자리에 불러앉히고 다짜고짜 "너...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 이렇게 시작한거다. 당시 책상 머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이 양반이 술먹고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사무실에 들어가질 않았다. 그냥 아무나 눈빛이 마주치면 불러 놓고 시비를 걸고 싶은거다. 이런 일이 두 세번쯤 있었다. 

언젠가 나는 멀찍이 기둥에 숨어서 회사의 여자선배 하나가 딱 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정말 갖은 욕을 다하고 ...고성을 질러댔다. 모두 하나 둘 자리를 떠서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일방적인 욕지거리 바탕이 끝나고 그 여자선배는 울음과 분노가 뒤섞여서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전체 회의에서 이 양반은 "어제...일은 내가 공식적으로 사과합니다. 후배님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나중에 이 양반 퇴직하는 날 이 여자선배는 정말 애증의 눈물을 흘렸다.이건 지난 일에 대한 분노만은 아니었다. 정말 애증이었다. 

하여간 이 양반은 퇴직할 때쯤...채 50도 안된 나이이다.... "직장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평생 그렇게 살았고 그런 줄만 알았는데 세상은 넓고 ,너무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각성의 말을 한 것이다. 이 양반은 본인이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일주일에 6번쯤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그게 다 일의 연장이고 술을 잘 마시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게 진짜 진정성 있게 일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가정사는 잘 모르겠으나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나 같은 인간들-은 일 안하는 인간들로 그는 받아들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퇴직을 앞두고 다른 각성의 말이 나온거다. 그는 너무 늦게 안 것이 아닐까?  아니 40대에 알았으니 늦은 건 아닌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 그동안 그의 삶의 방향과 다르다고 폭언을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늦거나 또는 너무 빠른 각성일지 모른다.

최근에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새벽 예배까지 말이다. 이건 거의 쇼킹한 뉴스였다. 그는 과거에 교회 다닌다고 술 안먹는 사람들은 아예 자기 옆으로 불러와서 인격모독에 가까운 술 권유 고문을 했다. 방법도 가지가지였고 일종의 가학적 쾌감까지 있는 듯 했다. 몇 몇 여자 친구들은 그것때문에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그러면 "됐다...치워라. 안 먹으면 됐지. 울긴 와우노? ..하여간 예수쟁이들은...니 예수가 가깝나 니 부장이 가깝나? 대답해봐라.....니 앞으로 나보지 말제이." 이런 식으로 어찌할바 몰라하는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부담감을 주었다. 그랬던 그가....새벽 기도 다닌단다. 나야 물론 기독교와 별로 친하지 않지만 어쨋거나 그가 지난 날의 과오를 새벽에 잘 씻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의 늦은 각성을 토대로 신앙 간증하고 다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직장이 전부는 아니다." "교회다녀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그가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도 잘 됐으면 한다.  

하여간 재미있는게 세상이고 인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