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마(dogma)
독단(獨斷)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인간의 구제를 위해서 신(神)이 계시한 진리를 말하며, 교회가 신적 권위를 부여한 신앙신조(信仰信條)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네이버에 나온 사전적 정의이다.
내가 기억하는 도그마는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으로 이용된 것이다. 흔히 현실과의 혼융 또는 교통을 놓쳐버린 마르크스주의 말이다. 마르크스는 누구보다 역사적으로 누적된 현실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는데도 말이다. 마르크스가 남겼다는 에피소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저런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도그마화된 곳을 만난다. 그런 사이트 중에는 정치적으로 수구 꼴통이 있는가 하면 진보 꼴통도 있다. 앞선 수구 꼴통과 진보 꼴통의 공통점은 단 한가지 자기의 규범적 판단만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단호하다는 공통분모를 나눈다. 사람들은 수구 꼴통의 퇴행보다는 그래도 진보 꼴통이 낫지 않겠느냐고 위안한다. 보수적 정서가 지배적인 곳에서 진보 꼴통은 최소한 틈을 벌리는 저항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진보 꼴통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끔 자기도취에 빠져 모험주의에 빠지거나 진보 내의 다양성에 대해 폄훼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가 빠진 도그마로 인해 소탐대실하는 경우도 있다. 반동의 기회만 더 확산시키고 자기는 의미론적 만족에 머물때도 허다하다. 이들은 그저 깃발의 꼭대기만을 보며 내가 그 깃발 아래 있다는 것에 역사의 영광과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도그마화된 기사단. 성지를 지키는 신의 군대. 바로 진보의 십자군이 되는 것이다. 대의제 하에서 어깨와 가슴에 그들의 소속을 상징하는 군표들을 하나 둘 붙이고 수구보수와 싸운다는 일념하에 녹슨 칼을 꺼내든다. 과거의 훈장을 꺼내기도 한다. 그것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악을 무기'로 삼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이명박에 싸우는 것을 진보라고 착각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같은 맥락일거라고 생각된다.
도그마된 진보 꼴통의 특징은-수구꼴통도 마찬가지이고- 타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블로그라는 문자문화공간을 예로 들자면 타인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체를 위한 방법론적 오독이 아니라 의식의 협착성이 다른 해석 공간의 존재를 말살 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구 세력들의 경우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악'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렇다보니 북한이 한 나쁜 짓은 원래 그들의 속성이고 그들의 유화적 모습이나 긍정적인 면은 나쁜 짓을 숨기기 위한 변장한 늑대의 모습이다. 결론은 북한은 '절대 악'이다. 그래서 뭘 해도 '악'이다. 경험적으로든 이데올로기적으로든 이미 모든 판단이 결정되어 있다. 진보 꼴통도 이와 비슷하다. 자기는 '선'의 편에 서 있다는 의식은 수구 꼴통이나 마찬가지다. 도덕이라는 요소는 물론 중요한 가치이다. 또한 철학적으로 상당히 문제적 요소이다. 내가 말하는 도덕은 자기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걸친 '의류로서의 도덕'이다. 갑옷으로서의 도덕이다. 물론 도그마화된 인간들에게는 그 도덕이 자기 옷이 된다.일종의 도덕-기계, 선-기계가 된다. 이렇게 되면 진보든 수구든 십자군 기사단들은 천국을 위한 복음의 전도사 역할도 맡는다. 전도하고 가르친다. 내가 정말 웃기는 건 그들이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걸 일러 '사제권력'이라고도 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진보 꼴통들의 세계관은 확실히 단순명료하다. 모든 것은 정권의 음모이고, 자본의 음모이다. 나와 다른 것은 '모두 적의 2중대'다. 신당참여를 목전에 두고'야권분열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모씨는 과거에 같은 논법으로 그 외의 정당들을 2중대로 폄하했다. 계급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계급의 이름 하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자, 또는 서발턴들의 목소리도 모두 계급의 적대선을 훼손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자본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렇지만 노동자는 자본의 공모자이자 자본의 수혜자로서 더 하층계급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물론 최종심급에서 우리는 자본의 핵심을 이야기해야만 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 내의 분화를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이 결코 자본의 잔인성과 자본에 대한 기소유예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을 갖는 것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인가?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착취의 대상이자 또 착취자일 수 있다는 의식은 노동자의 발걸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시각을 넓히고 노동 연대의 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 개개인에게도 성찰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현실적 맥락과 어우러져 그 한계선도 설정해야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하나의 단일 대오로 파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또 인식론적으로도 독단의 오류이다. 흔히 '동일성의 철학'이 가진 약점이다. 보수세력이 원하는 것은 '차이의 차별'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이의 인식'과 '차이의 연대'이다.
뭐 뻔한 이야기였다.더질더질